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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성제환의 메디치家 리더십] (17) 젊은 로렌초의 권력 장악 | 반대파 마찰 피하고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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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할아버지 코시모가 하셨던 방식대로 행동하려 합니다. 모든 정사는 헌법 테두리 내에서, 그리고 시민 입장에 서서 처리할 것입니다.” 로렌초가 아버지 피에로가 사망한 이튿날 밀라노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건넨 말이다.

하지만 정권은 기름진 음식을 먹은 입안의 혀처럼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 피에로 시절부터 시의회를 대체해 운영되던 ‘100인 위원회(Cento)’ 위원들이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약 100인 위원회 동의를 받지 못하면 행정부 격인 시뇨리아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한다. 100인 위원회는 그만큼 권력의 핵심 기관이었다. 100인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새로이 위원회를 구성하는 일은 꿈도 못 꿨다. 최측근(Tommaso Soderini, Luigi Guicciardini) 사이에서도 사소한 일로 의견이 갈릴 정도로 21살의 청년 로렌초에게 주어진 권력은 허약했다. 취약한 권력을 물려받은 20대 청년 로렌초는 위기를 극복하고 1492년 사망할 때까지 23년 동안 피렌체, 나아가 서유럽 전역의 정치·외교 분야에서 핵심 지도자로 활약한다. 후대 사가들은 로렌초를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 부른다.

아버지 피에로로부터 불안한 권력을 물려받은 젊은 지도자가 어떻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나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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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 리더십 

▷패배가 확실할 때 반격의 시기 기다려야

“로렌초가 권력을 유지할지 여부는 선거제도 개혁 여부에 달렸습니다.”

피렌체에 파견된 밀라노 대사는 밀라노 총독한테 급히 전령을 보냈다(1470년 7월 3일). 선거관리위원(Accoppiatori)은 행정부 고위 공직 후보자 자격을 검증하고, 최종 후보자 이름표를 가죽 주머니에 넣고 봉하는 임무를 맡았다. 고위 공직자는 봉해진 가죽 주머니에서 추첨으로 선출됐다. 따라서 선거관리위원이 후보자를 선정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견제를 위해 선거관리위원 선출은 100인 위원회 위원 2/3 동의를 받도록 했는데 100인 위원회 동의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로렌초 집권 초기 115명으로 구성된 100인 위원회 위원 중 60여명만이 메디치 가문 편이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로렌초는 100인 위원회가 선관위원을 선출하는 권한을 박탈하는 법안을 제출했지만 보기 좋게 부결당했다(1470년 7월 5일).

로렌초는 100인 위원회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법안 제출을 포기하고 때를 기다렸다. 이듬해 1월 9일, 마침내 기회가 왔다. 행정부 고위 공직이 메디치 가문에 우호적인 인사로 채워졌다. 이어 재임 중인 선거관리위원과 행정부 고위 공직자가 5년 임기의 새로운 선거관리위원을 선출하는 법안이 100인 위원회에 제출됐다. 공교롭게 6개월 임기 100인 위원회 위원도 새롭게 구성됐다. 처음에는 이 법안이 100인 위원회에서 쉽게 통과될 것 같지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2표 차로 통과됐다. 로렌초에 호의적인 행정부가 100인 위원회 의결 정족수를 2/3에서 과반수로 변경시켰기에 가능했다.

불안한 결과지만, 메디치 당파에 우호적인 9명의 선거관리위원이 선출돼 행정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청년 로렌초는 100인 위원회에 선거관리위원 심의 권한을 양보하는 전략,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를 발휘했다. 하지만 로렌초 입장에서는 반쪽의 승리였다. 이참에 100인 위원회를 개혁하지 못하면 선거관리위원을 선출할 때마다 매번 양보와 타협을 계속해야 했다. 100인 위원회를 반드시 개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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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e dei Cinquecento, 피렌체 시청사 2층에 지어진 시의회 회의실. 100인 위원회 위원의 회합 장소기도 했다. 1495년 건축가 Cronaca가 확장해 현재 모습에 이른다. 22×53m, 천장 높이는 18m에 달한다. 내부 장식은 화가 Vasari 작품(1463~1465년), Palazzo Vecchio,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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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 리더십 

▷상대가 원하는 것을 건네주고 개혁하라

당시 100인 위원회 의결을 얻기 위해서는 2/3 이상 찬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로렌초가 보기에 위원 115명 중 75명이 찬성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많아야 60명 정도가 메디치 당파에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계산했다. 이듬해 로렌초와 측근들은 100인 위원회를 개혁할 임시 특별위원회(Balie)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임시 특별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시민을 시청사 광장에 모아 직접 의견을 묻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행정부가 직접 제안했다. 민심도 메디치 가문에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정부는 신설되는 임시 특별위원회에 고위 공직자 후보를 검증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대가로 임시 특별위원회가 행사해오던 조세 징수와 긴급 재정지출 권한은 100인 위원회에 이전시킨다는 안을 제시했다. 상인이 대부분이었던 100인 위원회 위원들이 재정·조세와 관련된 권한을 갖는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특히 상인들은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는 재산평가세에 강하게 반발해왔다. 로렌초는 이들에게 친척과 자손이 임시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될 수 있다는 암시를 동시에 줬다.

임시 특별위원회의 위원 정수는 240명으로 정했다. 위원 중 40명은 행정부 고위 공직자와 현직 선거관리위원이 선출하고, 이들이 선출한 40명이 나머지 200명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정해졌다(1471년 7월 8일). 결국 행정부 고위 공직자와 선거관리위원들이 임시 특별위원회를 장악하는 형국이 됐다. 이듬해 1월 8일 임시 특별위원회는 100인 위원회가 행사하던 선거관리위원 심의 권한마저 가져간다. 로렌초는 100인 위원회에 조세제도 개혁과 긴급 재정지출 권한을 넘겨주고, 이들로부터 선거관리위원 선출 권한을 빼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조세와 재정지출 권한을 장악하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 로렌초와 측근들은 100인 위원회가 조세제도 개혁·재정지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을 2년으로 단축시켰다. 이 조치도 안심이 안 됐던지 전쟁이 발발하면 조세 징수 권한은 행정부에 귀속시킨다는 부칙을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로렌초는 아버지 피에로로부터 불안한 권력과 상대적으로 적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설상가상 20살에 권력을 물려받아 너무 젊다는 이유로 행정부 고위 공직에 취임할 수도 없었다. 위기에 처한 로렌초는 행정부 고위 관리를 선출하는 핵심적 직책인 선거관리위원을 장악하기 위해, 조세 징수 권한과 긴급 재정지출 권한까지 넘겨줬다. 이 사건은 피렌체 특유의 화해정치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울러 젊은 지도자 로렌초 고유의 장점, 타협 기술과 탁월한 계산 능력, 즉 말의 미묘한 뉘앙스와 숫자적 감각으로 피렌체 황금시대가 펼쳐진다.

타협과 양보를 배우지 못한 우리 정치인이 꼭 들여다봤으면 하는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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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환 medici60@naver.com 석좌교수·JB문화공간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67호 (2020.07.15~07.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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