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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60)해관 편 은졸…목민관 경조사에 백성 끌어들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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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각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의 업무량이 늘면서 과로사하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던 2월 전라북도 전주에서는 한 공무원이 코로나19 대응 업무를 수행하다 과로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에도 코로나19로 인한 공무원 과로사는 계속됐다. 지난 3월에는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한 공무원이 과로로 쓰러져 끝내 숨졌다. 4월에는 경상남도 합천군에서도 코로나19 지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공무원이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발견되기 전날까지 방역과 긴급 구호물자 전달, 발열 확인 등 코로나19 관련 업무를 총괄 관리했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지만 한국이 방역을 잘 이뤄내고 있는 데는 의료진의 힘과 함께 자기 몸을 던져 희생한 일부 공무원 역할도 컸다.

해관의 첫째 항목인 ‘체대’에서 20가지 교체 중 종체(終遞)를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벼슬이 교체되는 여러 상황 중 가장 불행한 교체가 바로 종체다. 임기 중 임지에서 죽어서 벼슬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다음 조항 ‘은졸(隱卒)’은 바로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목민관이 임기 중 사망하는 경우 목민관 유족들이 지켜야 할 자세와 백성들의 애도의 뜻을 통해 그의 생존 시의 선정(善政)을 살피는 문제를 다루는 조항이다.

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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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관 편 은졸은

▷선행 베푼 목민관 기리는 일

은졸은 재임 중 임지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목민관에게만 해당되는 조항이다. 그런 업적이 없거나 선정을 베풀지 않은 목민관은 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재임 중 죽은 후 고결한 인품이 더욱 빛나서 아전과 백성이 애도해 상여에 매달려 울부짖고 세월이 오래 지나도 못 잊는 것이 어진 목민관의 의미 있는 죽음이다.”

다산은 어진 수령이 사후에 받는 칭송과 찬양이 바로 은졸에서 거론되는 문제라고 했다. 죽은 뒤 백성들의 칭송과 찬양이 이어졌던 사례를 다산은 수없이 열거한다.

“양(梁)나라 임방이 의흥태수가 됐을 때의 일이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입을 옷이 없었다. 진군장군 심약이 아래위 옷 한 벌을 보내 맞이했다. 뒤에 신안태수가 돼 정사를 청렴하고 간결하게 했다. 임지에서 죽었는데 그는 가난해 염(殮)을 할 수가 없었다. 유언으로 신안의 물건 한 가지도 도성으로 가져가지 말라 했고 잡목(雜木)으로 관을 만들고 입던 옷을 빨아서 염하도록 했다. 온 고을 사람들이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죽을 때까지 청빈한 생활을 했던 목민관이 죽어서도 칭송을 받고 역사에 기록으로 남게 된다니, 이런 은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상수미(喪需米·상(喪)이 나면 나라에서 지급해주는 쌀)로 이미 나라에서 내리는 것이 있으니, 백성의 부의금을 어찌 또 받겠는가. 유언으로 받지 말라는 명령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내용은 오늘이나 옛날이나 의미 깊게 읽어야 할 대목이다.

‘속대전’에 규정된 내용을 다산은 자세히 언급했다. 관찰사나 목민관이 임지에서 친상을 당하면 호남·영남은 40석, 호서는 35석이다. 이런 나라의 법규가 있기 때문에 상을 당하거나 자신이 사망했다고 백성의 부의금을 받는 일은 절대로 금지했다.

▶마지막 조항은 유애

▷참다운 선정의 증거

목민심서 48권 72조항의 마지막인 ‘유애’로 목민심서 이야기는 끝난다. 유애란 ‘목민관이 임무를 마치고 임지를 떠난 뒤 그곳 백성들로부터 사모의 정을 받는 것이 참다운 선정을 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다루는 조항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백성들이 사랑과 사모의 정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죽은 뒤 은덕을 잊지 못하는 임지의 백성이 전임 수령을 위해 사당을 지어 제사 지내주는 일이 대표적인 유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정말로 감동을 받은 백성들이 오래도록 그런 정을 잊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목민관에게 자신이 근무했던 지역에 사당이 지어지는 일처럼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은 없다.

공정하고 청렴하게 목민관 생활을 했던 사람만이 유애의 아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다산은 많은 사례를 통해 다룬다.

“한문공(韓文公·한유)이 조주의 원님이 됐는데, 그곳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따랐다. 한유가 죽은 뒤 백성들이 사모해 조주성 남쪽에 사당을 세우고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김희(金熙·조선 세종 때의 신하)가 남원부사가 돼 백성을 자식같이 여기고 송사 판결을 물 흐르듯이 해 몇 년 만에 온 고을이 편안하게 됐다. 얼마 되지 않아 임지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기일에 항상 제사 지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백성을 진심으로 돌봐준 목민관은 죽은 뒤라도 백성들이 잊지 않는 법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서로 따라 하며 습속이 됐다”는 경고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른바 ‘생사당(生祠堂)’이라 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도 절대로 금지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의 업적을 기린다고 공적비나 기념비, 기념 조형물 같은 것을 만드는 일은 아무리 잘했던 치적이 있더라도 행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요즘 선출직 공직자나 고관대작이 업적을 자랑하려는 뜻으로 그런 유사한 일을 한다면 쌓은 업적도 날아가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옛날부터 관 뚜껑을 덮은 뒤 그 사람의 인물됨을 평가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살날이 많이 남은 사람이 이전의 업적이야 좋았다 해도, 비석이나 기념물을 세운 뒤 욕된 일을 하게 된다면 그 물건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현재도 여러 곳에 살아 있는 목민관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는 조형물이 서 있는데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참으로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과 큰 업적을 전하고 싶다면 세상을 떠난 뒤 공적비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다산의 교훈을 통해 배워야 한다.

목민심서 48권 72편은 유애라는 항목으로 끝을 맺는다. 임기 중에 선정을 베풀었던 목민관만이 유애라는 항목을 거론할 수 있다. 이 항목에서 목민관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했는가, 백성을 위하는 목민관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가가 판가름 난다.

“이미 떠난 지 오래됐는데 다시 이 고을을 지날 때 옛날 백성들이 반갑게 맞이해 보잘것없는 음식이나마 들고 앞에 몰려오면 따라간 하인들조차 영광이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옛 속담이 있듯, 옛 목민관을 잊지 않는 일처럼 아름다운 목민관의 치적은 없다.

다산은 이 같은 얘기를 통해 목민심서를 마무리한다.

“비난받을 정치를 했는가, 칭찬받을 정치를 했는가의 진실, 착한 정치였나 악한 정치였나를 판별하는 최종적인 결론은 군자(君子), 즉 높은 수준의 역사가의 평가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오직 민의와 역사만이 목민관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목민심서 마지막 조항인 해관 편 유애를 통해 박석무 박사의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는 막을 내립니다. 지금까지 칼럼을 아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매경이코노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66호 (2020.07.08~07.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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