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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詩想과 세상]하루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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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여기까지 오느라 날 저물었구나

한 생애의 중노동이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진다

잉잉거리며, 우글거리며

하루살이 떼는 채송화 꽃씨처럼 잘게 흩어진다

꽃씨? 그래, 꽃씨지!

끝 무렵에는 총 맞은 꽃씨 되자

꽃씨처럼 터지는 화약을 안고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진다, 하루살이 떼

조창환(1945~)

저녁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하루살이에겐 죽음을 준비하는 경건한 시간이다. 노을이 지면 수컷들은 무리를 지어 춤을 추고, 암컷들은 그 속으로 뛰어든다. “노을 속으로 뭉쳐져” 혼인비행을 한 하루살이 부부는 산란 후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만남부터 생산, 죽음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건 인간의 시간개념일 뿐이다. 시인은 하루살이의 저녁에서 “한 생애의 중노동”과 왜소함을 떠올린다. 드넓은 우주 속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잉잉거리며, 우글거리며” 살아가는 인간은 하루살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잘게 흩어”지는 하루살이를 보고 “채송화 꽃씨”를 떠올린 시인의 상상력은 놀라운 반전이다. 하루살이 떼의 비행은 그냥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허망한 죽음이 아니라 꽃씨를 품은 ‘새로운 탄생’이라는 것. 그러니 기왕 죽을 거면 “총 맞은” 것처럼, “화약을 안고” 터지듯 장렬하게 삶을 마감하자는 숭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곧 터지는 화약을 안고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최후의 비행을 하는 하루살이 떼, 이 얼마나 장엄한가.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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