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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설왕설래] 펜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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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지하철에 탔을 땐 양손을 어깨 높이 위로 올린다. 여자가 먼저 사귀자고 해도 문서로 확인하고 허락한다. 부하 직원과는 위계에 의한 죄로 처벌받을 각오를 했을 때만 사귄다. 회식에서는 여직원을 배제하되 그게 힘들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는다.” 남성이 성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한 ‘펜스룰’의 방법을 소개한 유머다.

펜스룰은 성추행 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아내 외의 여성과는 교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하원의원 시절인 2002년 인터뷰에서 “아내를 제외한 여성과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고 아내 없이는 술자리에 가지 않는다”고 밝힌 데서 유래했다. 국내에선 2018년 미투(Metoo: 나도 당했다)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자 그 반작용으로 등장해 유행어가 됐다.

펜스 부통령이 펜스룰의 원조는 아니다.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목사 빌리 그레이엄이 청교도적 절제를 되살리자는 취지에서 이 원칙을 내세웠다. 1989년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의 아내 힐러리가 그를 점심식사에 초대하자 “여성과 사적인 식사는 안 합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식당 한가운데서 식사하면 되잖아요?”라는 힐러리의 설득에 그레이엄 목사는 물러섰다고 한다.

고대 유가 경전 ‘예기(禮記)’에는 남녀가 일곱살이 되면 한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구절이 있다. 남녀의 접촉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뜻에서 펜스룰과 비슷하다.

지난 9일 극단적 선택을 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전직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사실이 알려지자 온라인에 펜스룰 지지 의견들이 올라오고 있다. “만에 하나 잘못될 수 있으니 비서는 남자를 쓰는 게 더 낫겠구나 싶다”는 글이 대부분이다. 고위 공직자들의 잇단 성추문은 여성 부하직원 탓이 아니다. 가해자의 비뚤어진 성의식이 문제의 근원이다. 폐쇄적인 조직문화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펜스룰은 성추행 피해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핑계로 성차별만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각살우(矯角殺牛) 아닌가. 펜스룰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고 유리천장을 공고히 만드는 논리일 뿐이다.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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