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6 (목)

[김기현의 철학이 삶을 묻다] 개인의 탄생, 쾌락의 해방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인류의 자산인 자유와 존엄

근대에 탄생한 ‘개인’에서 시작

쾌락을 좋은 삶 위한 변수로 인식

정의로운 사회와의 조화가 과제



다빈치와 루터가 함께하는 시선



표현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선거권, 재산권, 교육권. 대부분의 선진국 헌법은 개인들이 폭넓게, 그리고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명시한다. 또한 각 개인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꾸릴 자유가 있으며, 누구도 나의 삶을 지배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 되어 있다.

자유롭고 존엄한 독립적 인격체로 존중받으며 사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핵심이다. 고대와 중세에는 찾아볼 수 없던 근대의 산물인데,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근대를 생각하면 르네상스를 떠올린다. 대표적 인물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1486)에서 신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에게는 어떤 한계도 없으며, 오직 너만이 자신을 위하여 자연의 한계를 정할 뿐이다. 나는 너를 세계의 중심에 놓았으며, 너는 거기서 네 뜻대로 세계를 둘러보고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로도, 지상의 존재로도, 가사적 존재로도, 불사적 존재로도 만들지 않았다. 너는 영예롭게 지명된 재판관으로서 스스로의 틀을 짜고 제작하는 존재다. 너는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너 자신을 조각하면 된다.”

르네상스의 신화

중앙일보

1500년에 그린 알프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다빈치·루터와 동시대인이다. 뒤러는 독일의 르네상스 화가로 자신의 모습을 예수가 연상되는 방식으로 그렸다. 자아를 강하게 드러낸 초상화로 개인이 부각되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작품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스위스의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통하여 인간은 중세라는 천 년의 꿈에서 깨어나 “세계와 인간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암흑에서 빛으로, 종교와 미신에서 이성과 과학으로, 체제에 종속된 인간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중세의 지루한 스콜라 학문에 진력난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갖게 되면서, 고대의 인문학이 되살아남을 의미한다. 새로운 관심이 화산처럼 폭발하여 개인의 존엄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부르크하르트가 드라마틱하게 채색한 르네상스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읽고 예술을 다시 배운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 권리, 존엄에 대한 의식이 기적처럼 형성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도 르네상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과장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축적과 제도의 산물 개인

개인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의식은 긴 세월에 걸친 희생·헌신·숙성의 결과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장 28절)”라고 함으로써 고대의 불평등 사회와의 이별을 선언하였다.

물론 꽃을 피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인간이 모두 존엄하다는 의식의 싹을 심었다.

11~12세기 기독교 내의 자아를 성찰하는 움직임도 주목할만하다. 이념의 싹은 사회적 조건과 결합하여 현실로 나타난다. 중세 말의 농업과 상업의 발전, 그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 집중, 시민계급의 형성, 절대왕정의 구성에 따른 귀족 세력의 약화 등 사회적·제도적 요소들이 개인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라는 인류의 자산이 인고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모험심·호기심·창의성의 양분을 받아 자유로운 사상과 과학이 뒤따르고 산업이 발전하였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정신적 풍요는 이렇게 마련되었다.

쾌락의 해방

자유롭고 존엄한 개인의 탄생은 욕망과 쾌락에 대한 시각을 변화시킨다. 근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쾌락은 고운 시선을 받지 못했다. 고대에서 쾌락은 육체와 결합한 악한 것으로서, 이성에 의하여 통제되고 조절되어야 했다. 중세에서는 이성의 위치에 구원이 자리를 잡았다. 진정한 행복은 내세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천상의 복을 누리려면 현세에서 겸허하고, 연민으로 슬퍼하며, 의를 추구하고 때로 그 대가로 박해를 받아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에 눈뜨며, 개인이 사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개인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란다. 자연스레 공동체를 위하여 개인의 욕망과 쾌락을 양보하고 억압할 이유는 약해지고, 쾌감에 대한 전향적인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분방한 영혼을 가진 이탈리아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독일에서 종교의 타락을 개탄하며 기독교가 은총의 종교로 새로 태어날 것을 주장한 마틴 루터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쾌락에 개방적 태도는 이들의 차이를 가로지른다.

모나리자의 미소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는 미소로 유명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예술 작품에서의 미소는 천사나 아담과 이브 등의 종교적 인물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에 의한 복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예비되어 있었다.

엄숙주의적인 문화에서 일반인의 초상에 미소를 담는 것은 최소한 부적절하고, 나아가서는 경박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한 폭의 그림을 통하여 즐거움과 쾌감을 당당히 표현하여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표현하고자 한다. 리자 부인의 입장에서는 초상화의 모델로 미소를 짓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가수·음악가·광대를 고용하여 애써 모나리자의 미소를 화폭에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쾌락의 정원

면죄부 판매에 저항하며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만성적 우울증으로 고통받았고, 원죄 의식은 그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었다. 멜랑콜리에 시달리던 어느날 로마서 1장 17절에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가르침으로 회심을 하게 된다. 그는 구원의 문제는 교회라는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의 문제이며, 은총에 의지하여 믿음을 통하여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 자유로움으로 우리는 영원에서뿐 아니라 이 생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생에서 기쁨을 누리고 쾌락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며, 그래야 한다.

이렇게 종교개혁에 의하여 사람들의 기분 상태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고,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루터는 세상은 “쾌락의 정원”이 되어야 하며, “모든 슬픔은 사탄에게서 온다”라고 한다.

근대에 들어오며 개인의 탄생과 더불어 쾌락과 즐거움에 대한 태도가 성(聖)과 속(俗)의 모든 영역에서 긍정적으로 변화된다. 쾌락은 좋은 삶을 위해 통제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변수로 자리 잡는다.

쾌락에 대한 시선의 변화는 좋은 삶,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하게 되고, 삶을 이야기하는 근대의 철학자는 쾌락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개인의 욕망과 쾌락을 적절히 대우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그리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과제에 도전한다.

■ 멜랑콜리아의 역사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멜랑콜리(melancholy)는 비장에서 나오는 체액인 흑담즙이다. 그리스어로 melan은 ‘검다’를, chole는 ‘담즙’을 의미한다. 피·황담즙·점액과 더불어 사람의 기질에 영향을 미치는데, 흑담즙이 과다할 경우 우울함을 야기한다고 하였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스승인 피치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멜랑콜리와 천재성 사이의 긴밀한 관련을 이야기한다. 흑담즙이 쌓이는 것은 상상력, 지적인 명민함, 예지력 등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지식인의 절망감을 멋스럽게 이해하는 경향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도 이 전통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급격히 변하면서, 우울감과 관련된 낭만적 연상은 약화되고, 우울감을 제거하기 위한 온갖 의학적 조언들이 봇물을 이룬다. 17세기에 영국의 로버트 버튼 (Robert Burton)은 멜랑콜리를 다각도에서 상세하게 논의한 『멜랑콜리의 해부』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몸과 마음을 그토록 자주, 또 심하게 고통을 주는 이 유행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