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좋게 평하면 한 문화의 국제적 세련미와 난숙을 표현하지만, 다른 측면에선 그 문화가 사대와 공리공론에 빠졌거나 문화의 복잡화나 타락을 의미했다. 1, 2차 예송(禮訟)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광해군의 폐비사건에 폐륜을 내세우며 하나가 되었던 서인과 남인들은 인종반정의 성공 후 다시 갈렸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예송에서 피해를 입은 남인(南人)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윤선도는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경상도 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으나 풀려났다. 1623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전남 보길도의 세연정. 해마다 햇차가 나올 때면 여러 차 단체와 차인들은 이곳에서 차회를 열고 차문화행사를 갖는다. ‘차의 세계’ 제공 |
그는 인조반정 후에도 계속 관직을 사양했으나 봉림대군·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는 것만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벼슬길에 올랐으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1635년 파직되었다. 파직되어 있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경상도 수군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이미 함락된 후였다. 설상가상으로 1638년 난이 평정된 후 왕에게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盈德)으로 귀양 갔고, 이듬해 풀려났으나 세상에 크게 실망하여 전남 보길도(甫吉島)로 들어가 부용동(芙蓉洞)과 금쇄동(金鎖洞)에서 은거하였다.
그는 다시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 등을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직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또다시 서인과 맞서다가 패하여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되었고, 1667년(현종 8) 풀려나 다시 부용동에 은거하였다.
윤선도는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현종을 가르쳤으나 1차 예송 때 송시열과 갈리면서 인생이 큰 굴절을 맞았던 셈이다.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體而不正·아들이긴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고 하여 기년복을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의 길로 들어선다.
윤선도는 유배생활 중에도 차와 벗하며 지냈다. 그는 차 생활의 운치와 차례(茶禮)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는 몇 편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린 ‘복차계하운(復次季夏韻)’을 보자.
“산이 인가(人家)에 가까우니 풍속도 스스로 경박하구나./ 착하고 아름다운 그대의 말씀을 나는 전부터 자랑하여 왔네./ 사방엔 첩첩이 높은 봉우리 솟아 있고/ 앞뒤로는 명사십리 펼쳐 있다네./ 작은 집 낮은 울타리는 겨우 장만했지만/ 거친 차 현미밥도 많이 먹지 못했네./ 끝내 뜻이 맞지 않아 기대한 마음 멀어졌으니/ 오래오래 부용동에 있는 옛집이나 추억하려네.”
그가 1652년 임진년 4월 보길도에서 쓴 시이다. 보길도 부용동에 머물면서 쓴 또 다른 시 ‘석실묘연(石室墓煙)’을 보자.
“저녁 바닷바람 향긋한 연기 담고 와/ 높고 험한 산에 들어 석실에 흩어진다./ 옛 부뚜막에 아홉 번 끓인 선약(丹) 남았고/ 맑은 물 길어 찻물 달인다./ 석실 부엌의 차 끓인 연기 가득하니/ 구름인 듯 안개인 듯 꽃 가에 맴돈다./ 바람에 실려 날아가 섬돌에 도로 남고/ 달빛에 실려가다 냇물 위에 머무네.”
다음은 그가 차례를 지냈음을 전하는 산문이다.
“이제 곧 추석인데 혹자는 말하길 제를 폐하고 성묘를 하는 것이 옳다, 혹은 차례를 지내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이럴 때 사람마다 행하는 바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혹자는 말하기를, 퇴계 선생의 말씀이 묘 아래 재실에서 올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지만, 할 수 있다면 산소에 올라가서 하는 것이 옳고, 할 수 없다고 재실에서 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답이현풍 실성서(答李玄風 必成 書)’중 일부
해남 녹우당 전경. |
오늘날 차의 주요 유적지가 된 해남의 녹우당(綠雨堂)과 보길도의 세연정(洗然亭)은 바로 윤선도의 유배의 산물이다. 녹우당은 효종이 자신의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이다. 본래 수원에 있던 사랑채를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엔 500년 묵은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해남 윤씨는 윤선도의 고조부인 12세조 어초은(漁樵隱) 윤호정(尹孝貞)이 강진에서 해남으로 입향하면서 해남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대의 거부인 해남의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전 재산을 물려받은 입향조는 적선지가로 이름을 날려 이 일대의 큰집으로 자리 잡게 된다.
입향조로부터는 18대 종손인 윤형식(尹亨植)씨는 오늘날 해남 차문화를 이끌고 있다. 윤씨 종손의 말에 따르면 경북 안동의 이형상(李衡祥) 전주이씨 집안과는 혼반관계로 공재 윤두서의 첫째, 둘째 부인이 모두 이 집안에서 시집왔다고 한다. 미루어보면 남인들은 남인들끼리 혼인을 하였던 것 같다. 그때는 영남·호남이 갈린 것이 아니라 당색에 따라 서로 혼반을 이루고 긴밀한 교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호남의 혼인관계에 따라 문물이 서로 교류되고, 차 문화도 침투하고 서로 섞였을 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의 차문화를 취재발굴한 경험으로 보면 안동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補) 종택, 영천의 병와(甁瓦) 이형상 종택, 그리고 해남의 윤씨 종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남인 출신이다. 남인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차 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녹우(綠雨)는 본래 녹음이 우거질 때 내리는 비를 지칭한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집 뒤 산자락에 대나무와 비자 숲이 울창하여 바람이 불 때마다 쏴 하는 소리가 마치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 뒤 덕음산 자락의 비자림은 500년가량 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의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잘 간수한 숲이다. 녹우당 현판 글씨는 성호 이익의 이복형인 이서가 썼다고 한다.
해남윤씨 종가는 다산(茶山) 정약용의 외가이다. 다산이 강진 유배생활을 할 때 이 종가에서 수많은 책을 빌려 볼 기회가 없었으면 그의 방대한 학문을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윤씨 종가로 말하자면 당대에 조선 최대의 개인 서고였다. 해남윤씨는 윤선도와 외손인 다산으로 인해 차의 명소가 된 셈이다.
효종이 자신의 스승인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한 녹우당. ‘죽로다실(竹爐茶室)’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편액과 함께 ‘윤고산장학회(尹孤山奬學會)’ 현판이 걸려 있다. |
녹우당을 바라보니 저절로 시 한 수가 떠올랐다.
“푸른 비 내리니/ 하늘의 찻물이런가./ 옛 백련동 백련의 이슬을 받아 죽로(竹爐)에 끓이니/ 물 끓는 소리 하늘에 닿는 듯하다./ 외롭고 의로운 선비 이곳에 쉬었네./ 귀양살이에도 초연히 시 읊고/ 차로 목마름을 달랬으니/ 하늘이 내린 집이로다./ 덕음산(德陰山) 품 헤아릴 길 없다./ 무엇이 선비더냐, 풍류더냐/ 길 잃은 백성아, 아해들아/ 고산, 다산, 초의, 추사/ 이 넷 이름만으로 족하다./ 못은 백련지/ 산은 덕음산/ 그 사이에 진인(眞人)이 다 모였으니/ 다담이나 나누세.”
해남윤씨 가문 이외에도 앞에서 소개한 신흠-신익성-신익전-신정, 이수광-이민구-이현석의 가문도 차의 명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신익성(申翊聖·1588∼1644)은 아버지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남긴 ‘야언(野言)’에 담긴 내용을 하나하나 실천한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는 차를 마시는 선비 집에서 태어나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남편이 되었으니 품위 있는 선비차의 다풍(茶風)을 잇는 적임자였다.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우통수(于筒水)에 들려서 차를 끓여 마셨으며, 평상시에도 ‘다경(茶經)’을 탐독한 듯하다.
“높은 벼슬은 근심이 끝없으니/ 늦었지만 농사짓고 누에 치려 하네./ 우경(牛經)과 다보(茶譜)를 읽으면서/ 편안히 시와 글씨를 일로 삼으려 하네.”
“베갯머리에 푸른 하늘 펼쳐 있고/ 몸에는 밝은 햇살 비추네./ 봄새는 안개 밖에서 지저귀고/ 들나물은 눈 속에서 싹트네./ 밖에 사물들이 어찌 누가 되리./ 그윽한 삶, 이것이 자랑스럽다네./ 몇 잔 술에 조금 취하고/ 햇차로 목마름을 축이면 되네.”
“찬 구름 들에 내리니 저녁이 쌀쌀해지고/ 골목 안은 숙연한데 새 소리 어지럽네./ 지병을 구실로 다화(茶火)로 따뜻하게 하니/ 시혼(詩魂)은 섣달 매화의 맑음에 넘치네.”
그가 금강산(‘설악산’이라는 이름은 분단 후 새로 붙였다) 우통수를 찾은 산문은 그 물맛의 명성을 오늘에도 느끼게 한다.
“우통수는 작은 획에 고였는데 그 수원이 아주 멀다니 기이하다. 세상에 전하길 이 물이 특히 기이하다기에, 내 한 모금 마시니 달고 시원해서 차를 달려 마시니 더욱 좋았다.”
신익전(申翊全·1605∼1660)은 신흠의 아들이고, 신정(申晸·1628∼1687)은 신익전의 아들이다. 특히 신정은 뛰어난 차시를 많이 남겼다.
“대밭 길에 오는 이 없고/ 벌들은 아직 출입을 않는다네./ 꽃 그늘에서 술 깨려고/ 불을 피워 햇차 달이네.”
“해가 중천에 뜬 뒤 봄잠을 깨니/ 까마귀와 까치의 지저귐에 흥이 없다네./ 발 걷으니 꽃그림자 난간에 있고/ 누워서 보니 뜰에 차 연기 피어오르네.”
이수광의 아들인 이민구(李民求·1580∼1670)와 증손자 이현석(李玄錫·1647∼1703)을 잇는 가문도 이름난 다가(茶家)이다. 이민구는 병자호란 후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시부에 능한 차인이었다.
“둘레에 자갈모래 흘러내리고/ 높은 숲 옆에는 맑은 모래섬이네./ 담배 찾아 마부더러 멈추게 하고/ 차를 마시며 벗과 정담을 나누었네./ 이슬 머금은 국화는 가을 빛 드러내고/ 흔들리는 갈대는 전쟁의 저무는 소리/ 나그네는 진정 떠나야 하기에/ 벌써 이별의 아쉬움이 자라나네.”
“성스런 풀 인성도 바꾸나니/ 탁한 것을 맑게 한다네./ 찻사발 멈추고 마시고 싶지 않음은/ 내 본래 총명함에 염증을 낸 때문.”
“예부터 성현들은 편안한 자리 없었네./ 지금은 온 세상이 궁벽함에 이르렀는데/ 차 화로 술그릇도 신물(身物)에 관한 것이니/ 이사할 때 종들 보기에 부끄럽다네.”
이수광의 증손자 이현석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글씨를 잘 쓰는 차인이었다.
“산골 늙은이 호수와 바다 구별에 놀라고/ 편지통 보고 갑자기 길 멀다는 것을 알았네./ 창을 향해 끙끙 앓으니 더위에 갈등이 심하여/ 모름지기 맑은 바람에 실어 눈차(雪茶)를 띄워 보내네.”
이즈음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인 장유(張維·1587∼1638)도 이름난 차인이다. 그의 차시를 보자.
“필운동 서쪽 기슭에 내 집 있다네./ 골목 쪽문은 중개인 집이라네./ 십년 전쯤 늦단풍 심으면서/ 국화 십여 떨기 자리 옮겼네./ 새벽에 찬 샘물 길어 차 달이고/ 작은 문 열고 책 읽기 좋은 곳/ 가을의 그윽한 흥취에 빠져/ 가련한 나그네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네.”
“호남의 절간에서 스님 있는 곳을 찾았지./ 그때 선방 창 앞에서 차를 달여 마셨지./ 강산은 응당 기다리고 있지만/ 세월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네.”
장유는 또한 새로 들어온 담배가 차(茶)처럼 기호 식품으로 크게 유행할 것을 예언하는 산문도 지어 당시 차가 일상화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담배가 세상에 쓰이는 것이 흡사 중국의 차와 같이 퍼질 것이라 생각한다. 차는 위진 시대부터 시작하여 당송에 이르러 크게 성행하고, 오늘에 와서는 드디어 천하의 백성들이 매일 쓰는 필수품이 되어 물이나 곡식처럼 되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각다제(?茶制·전매사업)로 이익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지금 담배가 세상에 유행한 것이 십수년인데도 이같이 성행하니 백년 후에는 반드시 차와 더불어 이익을 다툴 것이다.”
차가 전매사업으로서 각광받던 시기가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객원논설위원·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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