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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이용수 할머니 “정대협이 다 못했다는 건 아니다”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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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할머니 동행 취재기

[경향신문]

경향신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19일 부산에 있는 한 사찰을 방문해 도관 스님과 위안부 운동의 방향을 놓고 대화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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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시위 새로운 방식 필요한 때
구호 아닌 한·일 학생 교류 통해
제대로 된 위안부 역사 교육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뭉뚱그려 이렇게 불리는 이들도 이름이 있다. 각자 거쳐온 세월이 다르고, 저마다의 일상을 보낸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소녀’ 혹은 ‘피해를 증언한 위안부 할머니’로 ‘납작하게’ 이해된다. 이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이거나 아니거나, 사죄·배상을 요구하거나 ‘민족을 배신했다’(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 수령에 대한 여론)고 이해되거나 하는 식이다.

지난 5월 위안부 운동에 대한 이용수 할머니(92·사진)의 문제제기도 그렇게 단순화돼 읽혔다. 정의기억연대(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대한 반대, 위안부 운동의 존폐 따위다. 더구나 정의연을 둘러싼 의혹제기 양상으로 번지면서 운동에 대한 이 할머니의 고민은 관심에서 밀려났다. 찬반과 선악, 용서와 분노 두 개의 선택지만 내미는 물음에 이 할머니의 목소리도 “수요시위 그만둬야” “정대협 없어져야”로 거칠게 압축되어 사회를 떠돌았다.

지난 19일 대구에서 이 할머니를 만났다. 김학순도, 김복동도, 길원옥도 아닌, 이용수. 1928년 대구에서 ‘놓으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고명딸로 태어난 이용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이름을 따 세례명을 ‘비비안나’로 지은 이용수 할머니다.

위안부 운동 방향에 대한 이 할머니의 말에는 단선적이지 않은 메시지들이 담겼다. 지난 한 달 반 한국 사회가, 각 진영의 입장에서 읽어낸 할머니의 말에 대해, 이 할머니는 다소 결이 다른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수요시위에 대해선 “시위를 이어가되, 다른 방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정대협이 무조건 다 못했다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거칠게 떠돌던 그간의 말에 담겨 있던 할머니의 본뜻이 스며 나왔다. 이 할머니는 2차 기자회견에서도 “운동을 끝내자는 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이후 방향과 고민은 잘 다뤄지지 않았다.

기자회견에 등장한 이 할머니의 “팔렸다” “속였다” 같은 말 뒤에는 정의연을 향한 분노만 농축되어 있다기보다, 30년 위안부 운동에 대한 아쉬움, 속상함, 걱정, 불안, 초조, 답답함, 섭섭함이 모두 담겼다. 30년 동안 ‘위안부’ 운동에 참여한 당사자이자, 문제 해결이 누구보다 절실한 인권운동가의 다층적인 심정이 얽힌 것이다. 소녀 또는 할머니로만 축약해 보지 않을 때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다. 사회가 여전히 갈등과 대결 양상에 주목하는 동안 이 할머니는 운동이 가야 할 방향을 구체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이용수 할머니와 약 8시간 동안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사죄·배상 구호뿐인 시위에 지쳐…‘위안부’ 문제의 실상 더 알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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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협이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에 증명하려던 노력은 고맙지만
위안부 문제의 역사 등을 시민에게 알리고 가르치는 활동은 부족
미래세대인 한·일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면 해결해주리라 믿어

오전 11시30분 동대구역. 코로나19 탓에 마스크를 쓴 이용수 할머니를 만났다. 인사를 건네는 이 할머니는 지난달 25일 기자회견 때와 비교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 할머니는 살던 집을 떠나 약 한 달 전부터 대구 시내 한 호텔에서 머문다. 기자회견 이후 혼자 지내기 불안했다. 상황은 할머니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기자들이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이 할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대구 동구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황태국을 먹던 이 할머니가 대뜸 말했다. “빨리 왔으면 부산에서 맛있는 걸 먹었을 텐데. 밥 먹고 부산으로 가십시다. 시간 괜찮지요?” 그 길로 계획에 없던 부산행이 시작됐다.

차를 타고 이동하던 이 할머니는 2차 기자회견 후 “걱정이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앞으로 위안부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매주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1444차에 달하는 동안, 할머니는 ‘문제 해결’이 더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사죄하고 배상하라’ 외침은 선명하지만 “구호뿐인 시위” 같았다. 일본도, 한국 학생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봤다. 수요시위에 ‘반일’ ‘토착왜구’ 표현이 난무하고, 일본에선 한국을 우기기만 하는 거짓말쟁이 취급했다.

“모르잖아요. 일본 학생들도 그렇고, 한국 학생들도 그렇고. 왜 맨날 한국은 일본보고 사죄하고, 배상하라카나. ‘위안부’는 또 뭐냐. 이걸 알려줘야지요. 그냥 ‘위안부’라고만 하면 뭘 알 수가 있어요? 천날만날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해봤자 남는 게 구호 빼고 더 있냔 말이에요. 일본에선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데 한국이 자꾸 거짓말한다케요. 제대로 알려줘야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고 해결이 되지요. 그러니까 그게 참 잘못됐지 않나 싶어요. 시위를 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지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전 세계를 누비며 피해를 증언했다. 국제무대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렇지만 이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단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직접 증언에 나서고, 시위에 나가지 않더라도 미래세대가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겠다 싶었다. 피해자가 남지 않았을 훗날의 운동 방향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녹음이 스쳐가는 창밖을 바라보다 이 할머니가 말했다.

“내가 200살까지 살겠나(웃음). 아이고. 싸워도 조금 힘이 들겠어. 기운이 펄펄 나고 그래야 하는데 좀 피곤하더라고.” 연단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복동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200살까지 살아서 반드시 일본의 사죄를 받겠다”고 자주 말하던 이 할머니였다.

“하고 싶은 말은 쌓였는데~ 한마디 말 못하고 떠나버린 당신을~.” 휴대전화 연락처 목록을 쭉 살펴보던 이 할머니가 ‘공항의 이별’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 할머니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할머니의 18번은 ‘여자의 일생’. 요즘 좋아하는 노래는 ‘보약 같은 사람’. “행복하게 살려면 노래를 듣고, 즐기고, 부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부산으로 가는 차에서 트로트 가락이 울려퍼졌다.

사람과 어울리기도 좋아하고, 호쾌하게 웃고, 짓궂은 농담도 주고받는 이 할머니이지만 과거 기억이 불쑥 찾아오기도 한다. 더운 날씨에도 담요를 덮은 채 이 할머니는 검지 마디를 만지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 거기 갔을 때 전기고문을 당했거든. 손가락이 갑자기 막 비틀어지곤 해. 쥐가 나고.” 요즘도 쥐가 나는 탓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이 할머니의 눈이 슬슬 감겼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이고 잠 올라칸다.”

한 시간 넘게 달려 오후 2시쯤 도착한 부산 해운대구 좌동. 시내에 있는 한 절이었다. 이 할머니가 알고 지내던 스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내렸다. 스님 두 분과 익숙한 듯 농담을 주고받던 이 할머니가 분위기를 바꿔 이야기를 꺼냈다. “스님, 제가 이제 교육방침이라든지, 어제도 다른 사람과도 이야기를 해봤는데….” 앞으로의 위안부 운동의 방향, 위안부 교육을 한다면 어떻게 이어나가면 좋을지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이 할머니는 기자회견 후 운동의 방향을 선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되도록 많은 이들과 만나 여러 의견을 듣는 중이라고 했다.

지난 5월 첫번째 기자회견을 할 때 이 할머니의 문제의식은 뚜렷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존의 운동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는 건 유효하지 않은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할머니의 문제제기는 ‘폭로’가 되어 정의연 ‘부실 회계 의혹’ 등으로 번져 나갔지만, 이 할머니 본인은 운동방식을 바꿔보자고 던진 화두였다. 스님과 할머니의 대화가 끝난 후 기자는 이 할머니에게 앞으로 위안부 운동이 가야 할 길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는 “지금은 좀 힘들고 괴롭지만, 앞으로 방식을 바꿔 운동이 이어지길 바란다”며 “수요시위를 안 할 수는 없지만 다른 방식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대협이 못했단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 세계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잘했잖아요. 그 사람들 다 잘해보겠다고 그렇게 한 것 아니에요. 그걸 생각하면 참 수고했고 고맙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위안부’ 문제의 역사가 어떤지, 어째서 한국은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지, 이걸 더 알려줬어야지요. 위안부를 세계에 알리는 데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요. 한 10년만 알리고, 20년은 해결하는 방법도 고민해서 다른 방식도 더 했어야 하는데. 그게 좀 세월이 야속하다는 거지요. 좀 그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뿐이지, 다른 것은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동안의 운동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외에 증명하고, 전 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활동으로 넓히는 데 집중했다면, 정작 위안부 문제의 역사와 한국이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며 요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등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가르치는 활동은 부족했다는 취지다. 이 할머니는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 개인에 대해선 “마음은 안됐어요. 열심히 했잖아요. 그런데 욕심을 덜 부렸으면 됐을 텐데…”라며 정계 진출에 여전한 서운함을 표했다.

이 할머니가 앞으로 바라는 위안부 운동의 길은 무엇일까. 이 할머니는 ‘교육’에 방점을 뒀다. ‘사죄하고 배상하라’ 같은 ‘납작한’ 구호에서 벗어나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더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지난 기자회견부터 ‘한·일 청소년의 교류’를 강조했다.

한·일 학생들이 자주 만나서 가까워지고, 자연스레 서로의 역사를 배울 수 있어야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좁혀진다는 취지다. 이 할머니는 한·일 젊은이들의 교육 얘기를 할 때마다 “내가 좀 더 배웠으면, 더 올바른 생각으로 할 텐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할머니는 시민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위안부 문제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영구적인 장소로 ‘위안부 역사 교육관’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 할머니는 “‘정신대’가 아닌 ‘위안부’ 역사 교육관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도록 교육하고 싶다”며 “미래세대인 한·일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나는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위안부 문제는 성폭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교육을 시작으로 세계의 평화 문제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두루뭉술한 계획을 넘어, 시민사회에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완전한 계획이 확정되면 기자들에게 알릴 것”이라며 “저도 오랫동안 싸워왔잖아요. 이제 너무 힘들어요”라고도 했다.

이 할머니와의 한나절 동행을 마치기 전 ‘세상이 할머니를 어떻게 불러주길 바라는지’ 물었다. 그는 ‘할머니’도 ‘어머니’도 아닌, ‘여성 인권운동가’가 좋겠다고 답했다.

“저는 자칭해서 여성인권운동가라고 하거든요. 그렇게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사실 ‘위안부’라고 하는 것은 참 쑥스러워요. 또 ‘성노예’라고 하기도 하는데, 내가 왜 그런 더러운 이름을 붙여서 들어야 하나 싶어요. 때로는 ‘위안부’라는 이름도 왜 내가 들어야 하나, 참 서러워요. 그렇지만 ‘위안부’라는 이름은 바꾸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일본이 ‘위안부’를 만들었는데 책임이 있잖아요. ‘위안부’ 이름을 바꾸면 일본이 지은 죄가 없어지니까 우리가 감당하고 말지. 그러니까 (가장 좋은 건) 나를 여성인권운동가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김학순이가 시작했고 위안부 운동 방식을 바꾸면서 마감하려는 이용수니까, 그래서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요.”

대구·부산 |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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