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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신간 '달 너머로 달리는 말' 펴낸 김훈 "이 시대 최고의 야만, 약육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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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나는 피난지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1966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무얼 배웠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다. 나는 인문주의에 굶주려 있었다. 대학이 제발 뭘 좀 가르쳐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시대의 대학은 젊은이들의 소망을 받아들여주지는 못했다. 선거가 잦았는데 선거 때마다 부정이 판을 쳤다. 선거가 한 번 지나면 전국의 대학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휘말렸다. 강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가끔씩 강의가 열리기도 했다. 19세기 낭만주의를 겨우 배웠다.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은 한바탕의 찬란한 경이였다.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인간은 아름답고 세계는 조화롭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앞날에는 자유와 이성이 꽃피고 산천은 본래 그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며 시간은 늘 새롭다는 얘기였다. 19세기 낭만주의는 내 유년의 불안과 박탈감 그리고 청년의 결핍을 달래고 메워주었다. 나는 그 책들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또 그 무렵에 '난중일기'를 읽었다. 이것은 내 생애의 사건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아, 낭만주의는 그야말로 낭만일 뿐이로구나…. 내 절망은 경악에 가까웠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벌벌 떨었고 때때로 울기도 했다."


글쓴이는 소설가 김훈(72)이다. 2004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가건물의 시대 속에서'라는 제목의 7쪽 길이 자전적 에세이에서 일부를 발췌했다. 김훈은 이 해 단편소설 '화장'으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에세이에는 어린 시절 패싸움 이야기가 나온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천막 교실에서 공부할 때였다. 교실은 난롯가에 앉는 아이들과 찢어진 천막 옆에 앉는 아이들로 나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리가 바뀌진 않았다. 김훈은 너무 추워 어느 날 난로에서 조개탄 몇 개를 집에서 가져간 깡통에 담아 갔다. 이후 찢어진 천막 옆에서 추위에 떨던 아이 모두 깡통을 학교로 가져왔다. 난롯가에 앉은 아이들이 춥다며 투덜댔다. 이어 패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잔인했다. 김훈은 "결사 항전했다"고 썼다.


역사에 없는 판타지 전쟁 이야기
말 두마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인간집단 사이 이해 못할 적대감


고단함이 느껴진다. 세상에 눈을 떠 보니 전쟁의 폐허였고 어렸을 때부터 그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그의 대표작들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김훈은 에세이에서 "내가 더 나이 먹고 더 갖추어졌을 때, 이순신이라는 사내에 관하여 무언가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꼈다"며 "그 후 30년이 훨씬 더 지나서 나는 졸작 '칼의 노래'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썼다.


김훈은 '칼의 노래(2001)' 외에 '현의 노래(2004)'와 '남한산성(2007)'도 썼다. '현의 노래'는 신라의 가야 정벌을, 영화로도 제작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삼는다.


김훈의 신간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도 전쟁 이야기다. 다만 세계 어느 역사에도 없던 전쟁 이야기를 그린다. 판타지다.


소설에서는 나하를 경계로 위쪽의 초, 아래쪽의 단이라는 나라로 나뉘어진 가상의 세계가 창조됐다. 초는 유목 부족을 통합한 나라다. 문자가 허술하고 맞서는 무리는 모조리 죽여서 묻는다. 단은 농경 민족으로 이뤄져 있다. 초원에 우뚝 솟은 봉우리를 백산이라 이름 붙였다. 농사나 싸움, 죽임과 살림의 문제를 백산에 물었다.


'토하'와 '야백'이라는 명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토하는 초나라 왕 표의 말이고 암말이다. 야백은 단나라 장수 황의 말이고 숫말이다. 초와 단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토하와 야백은 인간의 전장을 누빈다. 토하와 야백은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친 뒤 월이라는 나라에서 재회한다. 월에는 왕이 없다. 예닐곱 부족이 이웃해 있는 작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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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서울 마포구의 한 북카페에서 '달의 너머로 달리는 말'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김훈은 여기서 "내가 써내고자 하던 것은 인간 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적대감, 인간의 기초를 이루는 야만과 폭력, 야만의 과정에서 생기는 이른바 문명, 문화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고 밝혔다.


그는 덧붙였다. "고대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100년을 싸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싸웠다. 삼국사기에 보면 김부식이 피가 강물처럼 흘러서 방패가 떠내려갔다고 썼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그 시대의 풍경이 인간의 감성에 그렇게 비친 것이다. 한국 고대가 불교, 부처님의 자비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선택한다. 진보냐 보수냐, 좌파냐 우파냐 그런 이데올로기가 없다. 그럼에도 어떻게 피가 흘러 방패가 떠내려가도록 싸울 수 있는지, 그 뿌리는 무엇인지…. 그런 야만의 과정에서 문화가 비롯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끝없이 짓밟히면서도 저항하고 도망치려 하는 그런 생명들의 모습을 담아보려고 했다."


김훈은 말을 소설에 중요하게 등장시킨 것과 관련해 "말이 인간에 의해 사육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인간의 문명과 야만을 말이 감당해가는 모습을 담기 위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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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약육강식 청산하기 어려워
야만성의 제도화로 생겨먹은 세상
선의에 호소해서 해결할수 없는 문제


김훈은 또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야만은 분명하다"며 "약육강식"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이 약육강식을 청산하기 어렵다고도 말했다. "볼셰비키든, 프랑스든 인류 사회의 모든 혁명은 약육강식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혁명이 약육강식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전파하는 데 별로 기여를 못했다. 약육강식은 시스템화돼 드러난다. 야만성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고 인간은 그냥 (야만성이) 일상화하고 제도화돼서 이렇게 생겨 먹은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은 다시 이어진다. "(약육강식을) 인간의 선의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 역사적 경험이 없다. 약육강식의 문제는 나이브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소설의 배경이 판타지가 된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뒤에'라고 이름을 붙인 책의 후기에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라고 썼다.


책의 제목에 '달 너머'가 들어간 이유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현실과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담은….


에세이에도 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김훈이 유년 시절을 보낸,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부산 대산동 판자촌에는 자주 불이 났다. 어느해 보름달이 뜬 겨울밤에도 불이 났다. 김훈의 어머니는 불길을 피해 어느 높은 곳으로 김훈을 데려갔다. 김훈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어머니는 말했다. "훈아, 불타는 동네를 보지 말고, 저 달을 쳐다봐라." 나는 엉엉 울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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