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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섬마을 폐가 벽지에 왜 조선 군적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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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직원, 태안 신진도 177년 된 집서 발견…한시 3편도 나와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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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년 된 섬마을 폐가의 벽지에서 발견된 19세기 군적부. 군역의 의무가 있던 장정 명단과 특징을 적은 공문서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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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상량문이 보이네. 저건 ‘수군(水軍)’이라는 글자네.”

지난 4월21일 충남 태안 신진도에 근무 중인 정동환 산림청 산림수련관 시설관리인(45)은 연수원 근방 숲을 답사하다 폐가를 발견한다. 겉보기에 다 쓰러져가는 집 같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정동환씨의 눈에 상량문(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이 보였다. 또 뜯겨져 바람에 흩날리던 벽지 사이에서 한자 글씨들이 보였다. 얼핏 보니 ‘수군(水軍)’이었다. 정동환씨는 곧바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에 신고했다. 고향이 백제고도 부여여서 문화유산에 조예가 남달랐기에 신속한 후속 조치를 취한 것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전문가들과 함께 상량문을 읽어보니 ‘도광(道光) 23년 7월16일’이었다.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道光帝·1820~1850) 연호인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을 가리킨다. 폐가는 무려 177년 된 집이었던 것이다. 연구소의 추적 조사 결과 이 집은 1970년대 말 주인이 바뀐 후 50년 가까이 방치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벽지에서 확인된 글씨 역시 심상치 않았다.



‘수군(水軍) 김아지, 나이 정해생 15세, 키 4척, 거주지 내맹면, 아버지 윤희’ ‘보인(保人) 박복현, 나이 임오생 18세, 키 4척, 거주지 고산면, 아버지 성산’….

명문은 19세기 안흥진성을 지키던 수군의 군적부, 즉 군인 명단이었다. 이 군적부는 안흥진 소속 60여 명의 군역 의무자를 전투 군인인 수군(水軍)과 보조적 역할을 하는 보인(保人)으로 나눠 이름·주소·출생연도·나이·신장을 부친 이름과 함께 적어두었다. 수군의 출신지는 모두 당진현(唐津縣)이었고, 당진 현감 직인과 수결(手決·자필서명)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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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 23년’이라고 쓰여진 상량문.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재위 1820~1850)의 연호이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을 가리킨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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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신 서해문화재과 연구관은 4일 “수군 1인에 보인 1인으로 편성된 체제로 16세기 이후 수군편성 체계를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라고 밝혔다. 명문 중 ‘보인’은 직접 군복무를 하는 사람의 남은 가족을 재정적으로 돕는 비번자를 가리킨다.

문경호 공주대 교수(역사교육과)는 “작성 형식이나 시기로 미루어 수군의 징발보다는 군포를 거두어 모으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곳 안흥량(태안 앞바다) 일대 수군은 고려 후기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고, 유사시에는 한양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군 역할을 했다. 특히 안흥량은 물살이 매우 빨라 조운선의 난파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손태옥 서해문화재과 실무관은 “따라서 이곳 수군은 조선 최악의 험조처(지세가 가파르거나 험하여 막히거나 끊어진 곳)인 안흥량을 통행하는 조운선의 사고방지와 통제를 주요 임무로 삼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폐가에서는 판독이 가능한 한시(漢詩) 3편도 발견됐다. 이 시는 당시 조선 수군이거나 학식을 갖춘 당대인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수군진촌(水軍鎭村)의 풍경과 일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진도 수군진촌에 자리한 능허대 백운정은 예부터 안흥팔경의 하나인 ‘능허추월(凌虛秋月)’이라 했다. 중국의 능허대와 모습이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은석 서해문화재과장은 “이번 발견은 전략적 요충지였던 안흥량 일대에 분포한 수군진 유적과 객관(客館·사신 영접 관청) 유적의 연구와 복원 및 활용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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