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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제주4·3 끝나니 6·25…빨갱이 모욕당했지만 나라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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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참전용사들㊤]4·3 광풍 몰아치고 2년만에 6·25 참전

일부는 먹고 살기위해 입대…"애국심? 그런 여유 없었다"

[편집자주]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는 한국전쟁 당시 50만명의 장병을 배출하며 승리의 기반을 마련한 곳이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의뢰로 한국자치경제연구원이 맡은 '제주 육군 제1훈련소 구술조사 용역(2019년 4~12월)'에는 당시 교육받은 기간사병과 훈련병 들의 구술을 통해 4.3 사건 직후 전쟁에 휘말린 제주도민들의 아픔과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담겼다. 뉴스1제주본부는 두차례에 걸쳐 용역에 담긴 참전 생존자들의 증언을 소개한다.

뉴스1

제주4·3희생자추념일인 지난 4월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제주4·3 희생자 유족들이 4·3 영령에 참배하고 있다.2020.4.3 /뉴스1 © News1 오미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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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뉴스1) 고동명 기자 = "한이 맺힌 거죠. 그냥 쓴 말만 나와. 우리 직계를 빨갱이로 내리찍은 이승만이가 6·25 나니까...빨갱이를, 국가 상황이 긴박하니까 징병을 오라는 게 이게 뭐냐. 빨갱이를 전선에 보내서 충성하겠느냐. 아주 이상한 생각만 나는 거라"

열 아홉살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현 모 할아버지(90)는 70년 전 입대 당시를 생각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48년 제주에서는 이미 4·3 학살의 광풍이 몰아친 뒤였다.

4·3으로 남편과 아내, 부모와 형제자매를 빼앗긴 제주도민들은 2년만에 6·25라는 또 다른 현대사의 비극 한가운데 놓였다.

70년이 지난 뒤에도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단어에 민감한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6·25에 참전했던 제주도민 상당수는 국가 공권력이 저지른 4·3사건에 가족을 잃고 얼마 안돼 국가의 부름을 받아 지옥같은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현 할아버지는 "아무리 어두운 세상이라도 그렇게 하느냐 하면서도, 할수없이 (참전)갔다. 국민의 한사람이니까. 내가 할일 같아서 갔다"고 토로했다.

현 할아버지는 훈련소 16주동안 단 한차례 늙은 어머니가 늙은 암탉을 잡아 면회왔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4·3으로 아버지와 형제 3명을 잃고 어머니와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는 "바닷가에서 한 30분 어머니와 면회했다"며 "아들 하나 살아서 눈물겨운 닭 한마리 내놓고. '어머니도 이거 잡수세요'도 안 하고 허겁지겁 먹었다"고 털어놨다.

일부 도민들은 북한군과 싸우는 전쟁터에서조차 '빨갱이'라는 오해와 멸시를 견뎌내야했다.

이 모 할아버지(90)는 "제주도 출신은 빨갱이라고 해서 많이 모욕 당했다"며 "우린 어리니까 4·3이 어떤 건지도 몰랐는데. 육지 가니까 제주도라고 하면 빨갱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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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하루 앞둔 2019년6월5일 제주시 노형동 충혼묘지에서 어린이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2019.6.5 /뉴스1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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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도 제주 출신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활약하며 맹위를 떨쳤다는 증언도 있다.

김 모 할아버지는 "모두 제주 출신으로 구성된 소대도 있었다. 제주도 해병대 군인이라고 하면 왕이었다. 제주 출신들이 일선에서 싸웠다. 1만3000명이 (참전)가서 3000명 이상이 죽고 5000명은 부상당했다. 지금 1100명 정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성담을 쌓고 보초를 서는 등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던 4·3사건이 군대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4.3사건으로 피폐해진 생활을 이겨내려 군대를 택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애국심보다는 당장의 생존이 더 큰 문제였다.

신 모 할아버지(86)는 "쉽게 말해 일도 없고 배도 고프고 해서 군대에 갔다"며 "다른 건 없었다. 군대가면 전쟁터에 나간다는 건 생각 못했다. (나라를 전쟁에서 구해야겠다) 그런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러나 전쟁통인 훈련소에서도 훈련생들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6·25즈음 열살 어린아이였던 한 지역주민은 배고픈 훈련병들이 바닷가에서 해조류의 일종인 감태를 뜯어먹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 주민은 "훈련병들이 백사장에서 우비에 모래를 담아가는데 감태를 미역으로 알고 먹더라. 얼마나 배고파야 그걸 뜯어먹겠느냐"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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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폐쇄될 때까지 50만여 명의 장병이 훈련을 받은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전경.(제주도 제공)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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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화재청에 따르면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는 일제강점기에 건립돼 광복 전까지 일본군(오무라부대)이 주둔했다.

1946년 육군 제9연대 창설 및 1951년 3월31일 육군 제1훈련소 창설시 지휘소로 사용된 역사적 가치가 큰 시설물이다. 광복 직후 한국군 창설과 훈련 상황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56년 폐쇄될 때까지 50만여 명의 장병이 훈련을 받았다.

건군 60주년인 2008년 10월1일 등록문화재 제409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한국전쟁 70년주년을 맞아 제주 육군 제1훈련소를 보수정비해 개방할 예정이다.
kd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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