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택 문화운동가, 창작 판소리 명창]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증거(傳聞證據)에 대한 검토
10. 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의 진실
11.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12.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 – 애국가 시상(詩想)
13.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4.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난 회까지 열두 번에 걸쳐 연재를 하면서 나는 우리 대한민국 <애국가>에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이 있음을 분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혹은 뿌듯한 마음으로 드러내고 밝혀냈다. 두 개의 은폐(隱蔽)된 진실은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과 그 악곡(樂曲)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 혐의(嫌疑)였고, 한 개의 전도(顚倒)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가 만고의 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임에도 친일 민족반역자 윤치호로 뒤바뀌어 있는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그냥 이대로 놔둘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국민의 자존심을 되찾고 민족정기를 되살릴 것인가?
이제 <애국가> 곡조 교체에 대한 그 필요성과 타당성을 점검하고 국민 모두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애국가>의 대안을 모색할 시간이 되었다.
1. '반(反)애국자의 애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1) 안익태가 저지른 친일·친나치 행각의 진상(眞相)
① 1940년~1944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을 비롯한 유럽 추축(樞軸) 동맹국 지역에서 '한국인 안익태' 아닌 '일본인 에키타이 안'으로, 괴벨스(히틀러의 문화공보총책) 휘하의 독·일(獨·日)협회, 유럽 주재 일본 영사관, 주(駐) 베를린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비호 아래 나치즘 파시즘을 표방하는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단결과 침략전쟁을 선동하는 대규모 연주회 순회공연에 지휘자로 활약함.(주요 레파토리 '에텐라쿠(越天樂=일본 전래의 황실음악)')
② 일본 황기 2600년 기념을 위해 일본 정부가 추축 동맹국 유명 작곡가들에게 의뢰하여 작곡된 몇 개의 프로파간다 작품 중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 축전곡'을 열렬하게 지휘함.
③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만주환상곡'을 직접 작곡하고 지휘함. '만주환상곡'의 4악장 합창 부분 가사는 주(駐) 베를린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작사한 것으로 일본과 만주, 추축 3국의 단결과 동맹·번영을 찬양하는 내용임.
④ 주(駐) 베를린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 2년 반 동거하면서 그곳에 주소지를 두고 에하라 고이치의 후원과 비호를 받아 괴벨스가 주도하는 나치 침략전쟁 프로파간다에 부역(附逆)함.
OSS(미 CIA의 전신) 문서에 의하면 에하라 고이치의 비밀 직책은 독일 및 유럽지역을 총괄하는 일본국 정보총책이었음.
이상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에 관해서는 이해영 교수의 '안익태 케이스'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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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1. <안익태 케이스>(이해영 지음, 삼인 펴냄). ⓒ삼익 |
2)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① 안익태가 일본인 '에키타이 안' 이름으로 친일·친나치 행각을 벌이던 1940년~1944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해서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면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치열하게 싸우던 시기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미주(美洲) '대한인국민회'는 중경 임시정부에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곡조를 소개하고 미주에서의 사용 허가를 요청한 바, 임시정부는 이를 승인하고 안익태 곡조를 광복군들에게 보급하기도 했다.
만약 안익태의 반민족적 행각을 미주 동포들이나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알았다면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곡조를 승인 요청하거나 허용했을 리 만무(萬無)하다.
② 자신의 반민족 행위를 숨기고 스페인으로 피신한 안익태는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끝난 후 자기가 작곡한 애국가 곡조가 대한민국에서 공식 국가(國歌)로 사용됨을 알게 되고, 1955년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다.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작곡한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의 악보를 선물했는데, 맨 앞장에는 '한국환상곡'의 연주 연보(年譜)를 쭉 기록해놓았다. 그런데 그가 기록해놓은 연보는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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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2.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헌정한 코리아 판타지 악보 겉장.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이경분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128~129쪽. |
후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해 연도(年度) 해당 장소에서 연주된 곡목은 한국인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이 아니라 일본인 에키타이 안이 지휘한 '일본축전곡'과 '만주환상곡' 또는 '교쿠토(極東)'였다.
3)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안익태의 '반민족 행위'
① 1948년 12월에 제정 공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1장 제4조에 보면 '반민족 행위자'라 함은 '종교·사회·문화·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 민족적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해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를 말한다.
이에 의거하면 안익태는 '문화 부문에서 민족적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 나아가 나치 독일의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해 '작곡과 지휘'라는 '음악적 방법'으로 부역(附逆)한 자'이다.
② 2012년 '친일잔재 청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제정 공포된 '일제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반민족 행위자'라 함은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內鮮)융화 또는 황민화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로 규정되어 있다.
이에 의거하면 안익태는 '독일 내 일본 정보총책의 비호 아래 일·독 협회와 나치 하 제국음악원을 통한 독일·일본 추축 동맹의 강화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문화 선전·선동)에 앞장서 협력하고 활약한 자'가 된다.
4) 안익태의 경우는 반애국자가 애국자로 둔갑한 전형적인 사례
① 안익태는 한반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독일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친일·친나치 행각을 벌인지라, 당시 조선사람은 아무도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악한 것은, 안익태는 그러한 추축국 동맹지역에서 몰래 벌인 친일·친나치 행각을 이후 우리 국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고백하거나 반성한 적이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반민족 행위를 철저히 숨겼으며, 국민들은 단지 그가 애국가 작곡자라는 이유로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칭송하였다.
② 안익태는 애국가뿐 아니라 그가 대표작으로 내세우고 있는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에 대해서도 온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는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까지 친일·친나치 연주 이력을 애국적인 연주 이력으로 감쪽같이 속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환상곡'의 4악장 합창 부분 '한반도 찬가(讚歌)'가 1942년 연주된 '만주환상곡' 합창 부분 '만주·일본 찬가(讚歌)'를 자기표절(自己剽竊)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1942년 이전의 '코리아 판타지'는 3악장 구성이었으며, 4악장 합창 부분은 에하라 고이치가 작사한 '만주·일본 찬가' 가사로 '만주환상곡'에 처음 삽입(揷入)한 바, 해방 후 같은 주제 선율에 가사만 '한반도 찬가'로 바꾼 것이 현재의 완성된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이다.
③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코리아 판타지'의 작곡자라는 이유로 안익태에 대한 애국자적 환상이 만들어진 후, 그를 숭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근거없는 영웅화 작업이 시도됨으로써 그의 애국자적 허상은 더욱 고착되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안익태는 평생을 일관한 애국자의 표상으로 위인화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언론인 김경래 씨가 지은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 코리아 환상곡'이라는 책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반애국자가 애국자로 둔갑한'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5) 남의 나라 곡(曲)을 표절한 국가(國歌)란 있을 수 없다
애국가 곡조의 표절 문제에 대해서는 이 연재의 제5편 글에서 상론했으므로, 일단 다시 한번 참고하시기 바란다.(☞ 관련 기사 :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1964년과 1976년에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한 것이라는 논란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음악인들 사이에서나 언론 보도에서 이를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당시 우리 국민들이 안익태 씨를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대단한 애국자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우리 <애국가>와 작곡자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안익태 씨가 1급 친일 반민족 행위자요,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지금, 예전에 무마(撫摩)했던 불가리아 민요 표절 혐의(嫌疑)도 이제 다시 재소환되어야 한다. <애국가>의 작곡자가 더 이상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애국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두둔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세계 어느 나라에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를 반애국자의 작곡으로 부르는 나라가 있으며, 세계 어느 나라 국가(國歌)에 남의 나라 곡조를 표절한 곡(曲)을 사용하는 나라가 있단 말인가?
민족의 수치요 국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2.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는 이제 그만!
노래는 '부른다'고 하고, 그림은 '그린다'고 한다. 노래는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갖고 싶은 것, 마음에 품고 싶은 것을 이리 오라고, 가까이 오라고, 그리하여 내 품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은 자기가 그리워하는 것, 보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리움을 만남으로 승화(昇華)시키기 위해서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립지 않은 것은 그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원하지 않는 노래는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잊고 싶은 기억은 떠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니, 원하지 않는 노래는 애초 부르려 해도 불러지지 않고, 그립지 않은 것은 아무리 그리워하려고 해도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노래의 본질(本質)이고 그림의 속성(屬性)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애국가>는 어떠한가?
애국가 또는 국가(國歌)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우고 그 나라 국민의 이상과 지향을 담아내는 상징성을 확보한 국가대표 노래를 가리킨다. 따라서 한 나라의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가 성립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국가(國歌)로 성립 채택되는 과정에서 그 노래가 그 나라의 독립과 해방 또는 건국의 역사에 얼마나 관련하고 기여했는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 국가(國歌)가 자랑스러운 국가상징(國家象徵)으로서 현재와 미래에 우리 국민 모두에게 자부심을 주고, 국민 모두의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 제창(齊唱)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씨가 그동안의 명성과는 달리 심각한 친일 행위자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나치 정권의 제국주의 전쟁 선전선동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이를 알게 된 국민들이 더 이상 <애국가>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러나지 않으면 안 부르면 되는 것인데, 국가(國歌)이기 때문에, 국가(國歌)에 준하는 <애국가>이기 때문에 삼일절에도, 광복절에도, 현충일에도, 안익태 곡조로 국민 모두가 의무적으로 제창해야 하는 이 모순을 어찌 해결해야 할까? 국민적 자존심이 걸린 한·일(韓·日) 간 국제경기 개막식에서도 여전히 에키타이 안이 작곡한 곡조가 대한민국 애국가로 울려 퍼져야 하는 이 치욕을 어찌 해결해야 할까?
혹자는 말한다. <애국가>의 작곡자가 꼭 애국자여야 하느냐고…. 물론 <애국가>의 작곡자가 꼭 애국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애국가>를 작곡한 그것만으로도 애국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애국가>의 작곡자가 심각한 수준의 반애국자라면? 이건 문제가 다르다. '반애국자의 애국가' 이 말 자체가 형용 모순 아닌가? 자기모순(自己矛盾)이요 자가당착(自家撞着)인 것이다.
또 혹자는 말한다. 언제 우리가 작곡자가 누군지 따지면서 <애국가>를 불렀냐고…. 무책임한 말이다. 우리가 평소에 작곡자 따지지 않고 애국가를 부른 것은 작곡자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전제에서 그리 한 것이지, 작곡자에게 심각한 문제 그것도 반민족 행위의 혐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따지지 말자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노래도 아니고 '애국가'인데, 따지지 않고 어떻게 그냥 노래 부를 수 있나? 노래는 '부르는' 것인데, 김구를 속이고 이승만도 속이고 온 국민을 속인 반애국자 안익태의 곡 선율을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또 혹자는 이런 말도 한다. 안익태는 친일(親日)을 한 것이 아니라 극일(克日)을 했다고…. 궤변(詭辯)이다. 궤변과 논쟁하는 것은 번거롭고 불필요한 일이므로 단도직입(單刀直入)하자면, 안익태의 부역 행위를 극일이라고 옹호하는 것은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극일이라고 변명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완용의 매국 행위는 한반도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됐다는 것이고, 에키타이 안의 친일·친나치 행각은 조선사람 아무도 모르는 추축국(樞軸國=독일·이탈리아·일본) 제국주의 유럽 전장(戰場)에서 몰래 수행됐다는 차이일 뿐이다.
엄중히 묻는다. 에키타이 안의 친일·친나치 부역 행각이 드러난 지금에도 우리 국민은 현재의 애국가를 그대로 불러야 하는가? 오랫동안 불러온 관행이라는 핑계로 작곡자가 누군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불러야 하는가? 또 이러한 진실을 어린 학생들이 알면 대단히 불편하므로 안익태라는 사람의 실체를 쉬쉬하고 계속 위인으로 홍보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제 누구라도 나서서 거짓을 바로잡아야 한다. 온 국민을 속이고 온 국민을 바보로 만든 이 모든 허구와 가면을 벗겨내야 한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온 국민들에게, 전국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애국가> 작곡자의 반민족·반애국적 행위의 진실을 밝혀서, 이제 국가(國家) 공식행사나 각급학교 조례(朝禮) 행사에서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더 이상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제 스포츠대회의 개막과 시상식장에서 안익태의 '표절' 곡조가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울려 퍼지는 일이 더 이상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상징이요 대한 국민의 자부심이어야 할 <애국가>에 친일·친나치 부역자의 곡조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국가(國家)의 수치(羞恥)요 민족의 치욕(恥辱)이며 국민 자존심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상징이요 대한 국민의 자존심이어야 할 <애국가>에 동유럽 외딴 나라의 민요를 표절한 곡조를 아직도 사용하는 것 역시 국가(國家)의 수치(羞恥)요 민족의 치욕(恥辱)이며 국민 자존심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대한민국 <애국가>에서 안익태 곡조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의 의지로, 전 국민적 합의로 이제 안익태 곡조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해야 한다.
3. '윤치호 작사설'에 온전한 물적증거(物的證據)는 하나도 없다
나는 지난 글에서 대한민국 <애국가>에 일어난 '한 가지 뒤집힌 사실'이 작사자 문제임을 공개하였고,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가 아니라 도산 안창호 선생임을 여러 증거를 들어 논증하였다. 거기에는 나의 주관적 판단과 심증적 가설이 개재된 부분도 있지만, 그러한 가설을 전제로 연역(演繹)하거나 귀납(歸納)함으로써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을 논리적으로 증빙하고자 시도하였다.(☞ 관련 기사 :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과 시상(詩想))
이에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있어 '윤치호 작사설'이 배척되어야 하는 논리적 타당성을 먼저 정리해보기로 한다.
1) 소위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는 윤치호 자필이 맞는지 필적감정(筆跡鑑定)부터 필(畢)해야 한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있어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측과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쪽은 각각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증거들을 다수 제시해온 바, 양자(兩者) 간 결정적인 차이점은 '물적증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였다. 1955년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에서 '윤치호 유력설'이 관철된 것도 소위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와 '찬미가집 재판본'이라는 물증을 앞세워 주장한 것이 주효(奏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에 윤치호 자필이라 주장하며 제출된 '붓글씨 가사지'는 심각한 진위(眞僞) 논란에 직면하여 사실상 유야무야(有耶無耶) 증거 채택이 되지 못했으며, 찬미가집은 윤치호 측 유족들의 증언으로만 오락가락 불투명하게 거론되다가 당시에는 결국 증거자료로 제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윤치호 작사설'을 두둔하는 측에서 애초 증거력을 상실한 '붓글씨 가사지'와 '찬미가 재판본'을 시도 때도 없이 마치 새로 발견된 결정적 물증인 양 홍보(언론플레이)하면서 기정사실화 해온 것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허위이며 타당치 않은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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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3. 윤치호 자필이라는 소위 '붓글씨 가사지'. |
이 '붓글씨 가사지'가 윤치호 자필임을 주장하려면 필적감정(筆跡鑑定)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윤치호 후손들의 주장과는 달리 '붓글씨 가사지'는 윤치호 자필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글 제7편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의 전말(顚末)'과 제8편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증거에 대한 검토'에서 상세히 논했거니와, 향후 윤치호측이 '붓글씨 가사지'가 윤치호 자필임을 주장하려면 반드시 공식적이고 과학적인 필적감정(筆跡鑑定) 절차를 먼저 필(畢)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둔다.
둘째, 붓글씨 가사지가 설혹 윤치호 자필이라 하더라도 물적 증거로서의 증거력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가사지의 필서(筆書) 년도가 1907년(애국가를 작사한 해)이라면 증거력이 높겠지만, 후손들이 번복한 주장대로 그 가사지가 1945년 9월경(해방 직후 민족반역자로서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 쓴 것이라면 설혹 자필이라 하더라도 정황상 증거물로 인정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만약 '붓글씨 가사지' 필적감정 결과 윤치호의 자필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면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2)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은 그 자체로서는 증거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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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4.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 표지와 14장 patriotic hymn. |
윤치호 측이 또 하나 물적증거로 내놓는 것이 윤치호 역술(譯述) <찬미가> 재판본(1908)이다. 하지만 이 문헌은 그 자체로서 증거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역술(譯述)이라는 용어는 '번역하여 기술(記述)한다'는 의미의 단일어(單一語)이지 '번역도 하고 저술도 한다'는 복합어(複合語)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술(著述)은 출판 용어로 '글을 써서 책을 만든다'라는 뜻이고, 작사(作詞)는 문학 용어 또는 음악 용어로 '가사를 짓는다'는 뜻인 바, 저술과 작사는 전혀 다른 영역의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책의 어디에도 노래 가사의 작사자가 별도 명기되어 있지 않는 한, 저술자를 작사자로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이에 관해 제8편 글에서 '찬미가 재판본'의 '편집 의도'를 분석하여 거기 실린 세 편의 애국찬미가가 동일인의 작사가 아님을 추정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증거에 대한 검토) 특히 14장에 실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초판본에 없던 것이 재판본에 증보 추가된 것으로, 역술자의 작사가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음을 논리적으로 규명한 바 있다.
따라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의 경우 그 자체만으로는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을 증빙할 증거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동안 일부에 의해 기정사실(旣定事實)처럼 주장되어온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에 사실상 온전한 물적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미주 <신한민보>에 실린 '국민가' 윤치호 작(作) 증거력은 안익태의 증언으로 이미 제척(除斥)되었다
윤치호 측이 물적증거로 내세우는 또 다른 자료가 1910년 9월 21일 자 미주(美洲) <신한민보>에 실린 기사이다. 거기에 '국민가'라는 제목으로 현행 애국가 가사가 실려있고 '윤티호'라는 이름이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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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5. 미주 <신한민보> 1910년 9월 21일 자 기사. |
하지만 이 자료는 '1차 증거자료'가 아니므로 다른 증거들에 의해 '윤치호 작사(作詞)'가 확실하게 규명될 경우 보충자료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윤치호 작사를 증빙하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910년 9월이면 한일합방(1910년 8월 29일) 직후인데, 1907년 완성된 이 애국가 가사가 어떤 경로로 미주에 전해져서 실리게 되었는지, 전달자는 누구이며 그가 작사자를 윤치호로 알려준 것은 어떤 정보에 의한 것인지, 또 신한민보는 그 가사의 제목을 왜 '국민가'라 했는지 등등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민가' 제목의 새 애국가 작사자가 사실은 윤치호가 아님에도 '윤치호 작사'로 실리게 된 어떤 다른 정황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假說)이다.
이 가설은 역설적으로 1910년 9월 10일 이후 미주(美洲) 동포들 사이에서 더 이상 '국민가' 가사(歌詞)의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 않은 사실에서 성립되고 있다. 말하자면 미주 동포들 사이에서는 1910년 <신한민보> 기사에 기재된 '윤티호'라는 문구가 사실과 다른 와전(訛傳)된 정보였음이 공유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설(逆說)을 증빙하는 인물이 다름아닌 안익태이다. 안익태 자서전이자 평전 격인 김경래 씨의 저서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 코리아환상곡>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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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6.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 코리아 환상곡>(김경래 지음, 현암사 펴냄)와 황사선 목사 관련 내용(90~9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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