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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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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택 문화운동가, 창작 판소리 명창]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증거(傳聞證據)에 대한 검토

10. 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의 진실

11.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12.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 – 애국가 시상(詩想)

13.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4.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난 회까지 열두 번에 걸쳐 연재를 하면서 나는 우리 대한민국 <애국가>에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이 있음을 분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혹은 뿌듯한 마음으로 드러내고 밝혀냈다. 두 개의 은폐(隱蔽)된 진실은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과 그 악곡(樂曲)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 혐의(嫌疑)였고, 한 개의 전도(顚倒)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가 만고의 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임에도 친일 민족반역자 윤치호로 뒤바뀌어 있는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그냥 이대로 놔둘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국민의 자존심을 되찾고 민족정기를 되살릴 것인가?

이제 <애국가> 곡조 교체에 대한 그 필요성과 타당성을 점검하고 국민 모두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애국가>의 대안을 모색할 시간이 되었다.

1. '반(反)애국자의 애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1) 안익태가 저지른 친일·친나치 행각의 진상(眞相)

① 1940년~1944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을 비롯한 유럽 추축(樞軸) 동맹국 지역에서 '한국인 안익태' 아닌 '일본인 에키타이 안'으로, 괴벨스(히틀러의 문화공보총책) 휘하의 독·일(獨·日)협회, 유럽 주재 일본 영사관, 주(駐) 베를린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비호 아래 나치즘 파시즘을 표방하는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단결과 침략전쟁을 선동하는 대규모 연주회 순회공연에 지휘자로 활약함.(주요 레파토리 '에텐라쿠(越天樂=일본 전래의 황실음악)')

② 일본 황기 2600년 기념을 위해 일본 정부가 추축 동맹국 유명 작곡가들에게 의뢰하여 작곡된 몇 개의 프로파간다 작품 중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 축전곡'을 열렬하게 지휘함.

③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만주환상곡'을 직접 작곡하고 지휘함. '만주환상곡'의 4악장 합창 부분 가사는 주(駐) 베를린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작사한 것으로 일본과 만주, 추축 3국의 단결과 동맹·번영을 찬양하는 내용임.

④ 주(駐) 베를린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 2년 반 동거하면서 그곳에 주소지를 두고 에하라 고이치의 후원과 비호를 받아 괴벨스가 주도하는 나치 침략전쟁 프로파간다에 부역(附逆)함.

OSS(미 CIA의 전신) 문서에 의하면 에하라 고이치의 비밀 직책은 독일 및 유럽지역을 총괄하는 일본국 정보총책이었음.

이상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에 관해서는 이해영 교수의 '안익태 케이스'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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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1. <안익태 케이스>(이해영 지음, 삼인 펴냄). ⓒ삼익



2)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① 안익태가 일본인 '에키타이 안' 이름으로 친일·친나치 행각을 벌이던 1940년~1944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해서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면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치열하게 싸우던 시기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미주(美洲) '대한인국민회'는 중경 임시정부에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곡조를 소개하고 미주에서의 사용 허가를 요청한 바, 임시정부는 이를 승인하고 안익태 곡조를 광복군들에게 보급하기도 했다.

만약 안익태의 반민족적 행각을 미주 동포들이나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알았다면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곡조를 승인 요청하거나 허용했을 리 만무(萬無)하다.

② 자신의 반민족 행위를 숨기고 스페인으로 피신한 안익태는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끝난 후 자기가 작곡한 애국가 곡조가 대한민국에서 공식 국가(國歌)로 사용됨을 알게 되고, 1955년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다.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작곡한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의 악보를 선물했는데, 맨 앞장에는 '한국환상곡'의 연주 연보(年譜)를 쭉 기록해놓았다. 그런데 그가 기록해놓은 연보는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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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2. 안익태가 이승만에게 헌정한 코리아 판타지 악보 겉장.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이경분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128~129쪽.



후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당해 연도(年度) 해당 장소에서 연주된 곡목은 한국인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이 아니라 일본인 에키타이 안이 지휘한 '일본축전곡'과 '만주환상곡' 또는 '교쿠토(極東)'였다.

3)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안익태의 '반민족 행위'

① 1948년 12월에 제정 공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1장 제4조에 보면 '반민족 행위자'라 함은 '종교·사회·문화·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 민족적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해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를 말한다.

이에 의거하면 안익태는 '문화 부문에서 민족적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 나아가 나치 독일의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해 '작곡과 지휘'라는 '음악적 방법'으로 부역(附逆)한 자'이다.

② 2012년 '친일잔재 청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제정 공포된 '일제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반민족 행위자'라 함은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內鮮)융화 또는 황민화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로 규정되어 있다.

이에 의거하면 안익태는 '독일 내 일본 정보총책의 비호 아래 일·독 협회와 나치 하 제국음악원을 통한 독일·일본 추축 동맹의 강화와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문화 선전·선동)에 앞장서 협력하고 활약한 자'가 된다.

4) 안익태의 경우는 반애국자가 애국자로 둔갑한 전형적인 사례

① 안익태는 한반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독일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서 친일·친나치 행각을 벌인지라, 당시 조선사람은 아무도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악한 것은, 안익태는 그러한 추축국 동맹지역에서 몰래 벌인 친일·친나치 행각을 이후 우리 국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고백하거나 반성한 적이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반민족 행위를 철저히 숨겼으며, 국민들은 단지 그가 애국가 작곡자라는 이유로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칭송하였다.

② 안익태는 애국가뿐 아니라 그가 대표작으로 내세우고 있는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에 대해서도 온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는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까지 친일·친나치 연주 이력을 애국적인 연주 이력으로 감쪽같이 속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환상곡'의 4악장 합창 부분 '한반도 찬가(讚歌)'가 1942년 연주된 '만주환상곡' 합창 부분 '만주·일본 찬가(讚歌)'를 자기표절(自己剽竊)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1942년 이전의 '코리아 판타지'는 3악장 구성이었으며, 4악장 합창 부분은 에하라 고이치가 작사한 '만주·일본 찬가' 가사로 '만주환상곡'에 처음 삽입(揷入)한 바, 해방 후 같은 주제 선율에 가사만 '한반도 찬가'로 바꾼 것이 현재의 완성된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이다.

③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코리아 판타지'의 작곡자라는 이유로 안익태에 대한 애국자적 환상이 만들어진 후, 그를 숭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근거없는 영웅화 작업이 시도됨으로써 그의 애국자적 허상은 더욱 고착되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안익태는 평생을 일관한 애국자의 표상으로 위인화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언론인 김경래 씨가 지은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 코리아 환상곡'이라는 책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반애국자가 애국자로 둔갑한'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5) 남의 나라 곡(曲)을 표절한 국가(國歌)란 있을 수 없다

애국가 곡조의 표절 문제에 대해서는 이 연재의 제5편 글에서 상론했으므로, 일단 다시 한번 참고하시기 바란다.(☞ 관련 기사 :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1964년과 1976년에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한 것이라는 논란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음악인들 사이에서나 언론 보도에서 이를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당시 우리 국민들이 안익태 씨를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대단한 애국자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우리 <애국가>와 작곡자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안익태 씨가 1급 친일 반민족 행위자요,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지금, 예전에 무마(撫摩)했던 불가리아 민요 표절 혐의(嫌疑)도 이제 다시 재소환되어야 한다. <애국가>의 작곡자가 더 이상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애국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두둔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세계 어느 나라에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를 반애국자의 작곡으로 부르는 나라가 있으며, 세계 어느 나라 국가(國歌)에 남의 나라 곡조를 표절한 곡(曲)을 사용하는 나라가 있단 말인가?

민족의 수치요 국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2.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는 이제 그만!

노래는 '부른다'고 하고, 그림은 '그린다'고 한다. 노래는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갖고 싶은 것, 마음에 품고 싶은 것을 이리 오라고, 가까이 오라고, 그리하여 내 품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은 자기가 그리워하는 것, 보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리움을 만남으로 승화(昇華)시키기 위해서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립지 않은 것은 그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원하지 않는 노래는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잊고 싶은 기억은 떠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니, 원하지 않는 노래는 애초 부르려 해도 불러지지 않고, 그립지 않은 것은 아무리 그리워하려고 해도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노래의 본질(本質)이고 그림의 속성(屬性)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애국가>는 어떠한가?

애국가 또는 국가(國歌)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우고 그 나라 국민의 이상과 지향을 담아내는 상징성을 확보한 국가대표 노래를 가리킨다. 따라서 한 나라의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가 성립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국가(國歌)로 성립 채택되는 과정에서 그 노래가 그 나라의 독립과 해방 또는 건국의 역사에 얼마나 관련하고 기여했는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 국가(國歌)가 자랑스러운 국가상징(國家象徵)으로서 현재와 미래에 우리 국민 모두에게 자부심을 주고, 국민 모두의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 제창(齊唱)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씨가 그동안의 명성과는 달리 심각한 친일 행위자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나치 정권의 제국주의 전쟁 선전선동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이를 알게 된 국민들이 더 이상 <애국가>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러나지 않으면 안 부르면 되는 것인데, 국가(國歌)이기 때문에, 국가(國歌)에 준하는 <애국가>이기 때문에 삼일절에도, 광복절에도, 현충일에도, 안익태 곡조로 국민 모두가 의무적으로 제창해야 하는 이 모순을 어찌 해결해야 할까? 국민적 자존심이 걸린 한·일(韓·日) 간 국제경기 개막식에서도 여전히 에키타이 안이 작곡한 곡조가 대한민국 애국가로 울려 퍼져야 하는 이 치욕을 어찌 해결해야 할까?

혹자는 말한다. <애국가>의 작곡자가 꼭 애국자여야 하느냐고…. 물론 <애국가>의 작곡자가 꼭 애국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애국가>를 작곡한 그것만으로도 애국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애국가>의 작곡자가 심각한 수준의 반애국자라면? 이건 문제가 다르다. '반애국자의 애국가' 이 말 자체가 형용 모순 아닌가? 자기모순(自己矛盾)이요 자가당착(自家撞着)인 것이다.

또 혹자는 말한다. 언제 우리가 작곡자가 누군지 따지면서 <애국가>를 불렀냐고…. 무책임한 말이다. 우리가 평소에 작곡자 따지지 않고 애국가를 부른 것은 작곡자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전제에서 그리 한 것이지, 작곡자에게 심각한 문제 그것도 반민족 행위의 혐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따지지 말자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노래도 아니고 '애국가'인데, 따지지 않고 어떻게 그냥 노래 부를 수 있나? 노래는 '부르는' 것인데, 김구를 속이고 이승만도 속이고 온 국민을 속인 반애국자 안익태의 곡 선율을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또 혹자는 이런 말도 한다. 안익태는 친일(親日)을 한 것이 아니라 극일(克日)을 했다고…. 궤변(詭辯)이다. 궤변과 논쟁하는 것은 번거롭고 불필요한 일이므로 단도직입(單刀直入)하자면, 안익태의 부역 행위를 극일이라고 옹호하는 것은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극일이라고 변명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완용의 매국 행위는 한반도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됐다는 것이고, 에키타이 안의 친일·친나치 행각은 조선사람 아무도 모르는 추축국(樞軸國=독일·이탈리아·일본) 제국주의 유럽 전장(戰場)에서 몰래 수행됐다는 차이일 뿐이다.

엄중히 묻는다. 에키타이 안의 친일·친나치 부역 행각이 드러난 지금에도 우리 국민은 현재의 애국가를 그대로 불러야 하는가? 오랫동안 불러온 관행이라는 핑계로 작곡자가 누군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불러야 하는가? 또 이러한 진실을 어린 학생들이 알면 대단히 불편하므로 안익태라는 사람의 실체를 쉬쉬하고 계속 위인으로 홍보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제 누구라도 나서서 거짓을 바로잡아야 한다. 온 국민을 속이고 온 국민을 바보로 만든 이 모든 허구와 가면을 벗겨내야 한다.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온 국민들에게, 전국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애국가> 작곡자의 반민족·반애국적 행위의 진실을 밝혀서, 이제 국가(國家) 공식행사나 각급학교 조례(朝禮) 행사에서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더 이상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제 스포츠대회의 개막과 시상식장에서 안익태의 '표절' 곡조가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울려 퍼지는 일이 더 이상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상징이요 대한 국민의 자부심이어야 할 <애국가>에 친일·친나치 부역자의 곡조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국가(國家)의 수치(羞恥)요 민족의 치욕(恥辱)이며 국민 자존심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상징이요 대한 국민의 자존심이어야 할 <애국가>에 동유럽 외딴 나라의 민요를 표절한 곡조를 아직도 사용하는 것 역시 국가(國家)의 수치(羞恥)요 민족의 치욕(恥辱)이며 국민 자존심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대한민국 <애국가>에서 안익태 곡조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의 의지로, 전 국민적 합의로 이제 안익태 곡조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해야 한다.

3. '윤치호 작사설'에 온전한 물적증거(物的證據)는 하나도 없다

나는 지난 글에서 대한민국 <애국가>에 일어난 '한 가지 뒤집힌 사실'이 작사자 문제임을 공개하였고,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가 아니라 도산 안창호 선생임을 여러 증거를 들어 논증하였다. 거기에는 나의 주관적 판단과 심증적 가설이 개재된 부분도 있지만, 그러한 가설을 전제로 연역(演繹)하거나 귀납(歸納)함으로써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을 논리적으로 증빙하고자 시도하였다.(☞ 관련 기사 :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과 시상(詩想))

이에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있어 '윤치호 작사설'이 배척되어야 하는 논리적 타당성을 먼저 정리해보기로 한다.

1) 소위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는 윤치호 자필이 맞는지 필적감정(筆跡鑑定)부터 필(畢)해야 한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있어 '윤치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측과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쪽은 각각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증거들을 다수 제시해온 바, 양자(兩者) 간 결정적인 차이점은 '물적증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였다. 1955년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에서 '윤치호 유력설'이 관철된 것도 소위 '붓글씨 애국가 가사지'와 '찬미가집 재판본'이라는 물증을 앞세워 주장한 것이 주효(奏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에 윤치호 자필이라 주장하며 제출된 '붓글씨 가사지'는 심각한 진위(眞僞) 논란에 직면하여 사실상 유야무야(有耶無耶) 증거 채택이 되지 못했으며, 찬미가집은 윤치호 측 유족들의 증언으로만 오락가락 불투명하게 거론되다가 당시에는 결국 증거자료로 제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윤치호 작사설'을 두둔하는 측에서 애초 증거력을 상실한 '붓글씨 가사지'와 '찬미가 재판본'을 시도 때도 없이 마치 새로 발견된 결정적 물증인 양 홍보(언론플레이)하면서 기정사실화 해온 것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허위이며 타당치 않은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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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3. 윤치호 자필이라는 소위 '붓글씨 가사지'.




이 '붓글씨 가사지'가 윤치호 자필임을 주장하려면 필적감정(筆跡鑑定)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윤치호 후손들의 주장과는 달리 '붓글씨 가사지'는 윤치호 자필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글 제7편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의 전말(顚末)'과 제8편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증거에 대한 검토'에서 상세히 논했거니와, 향후 윤치호측이 '붓글씨 가사지'가 윤치호 자필임을 주장하려면 반드시 공식적이고 과학적인 필적감정(筆跡鑑定) 절차를 먼저 필(畢)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둔다.

둘째, 붓글씨 가사지가 설혹 윤치호 자필이라 하더라도 물적 증거로서의 증거력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가사지의 필서(筆書) 년도가 1907년(애국가를 작사한 해)이라면 증거력이 높겠지만, 후손들이 번복한 주장대로 그 가사지가 1945년 9월경(해방 직후 민족반역자로서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 쓴 것이라면 설혹 자필이라 하더라도 정황상 증거물로 인정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만약 '붓글씨 가사지' 필적감정 결과 윤치호의 자필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면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2)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은 그 자체로서는 증거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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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4.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 표지와 14장 patriotic hymn.




윤치호 측이 또 하나 물적증거로 내놓는 것이 윤치호 역술(譯述) <찬미가> 재판본(1908)이다. 하지만 이 문헌은 그 자체로서 증거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역술(譯述)이라는 용어는 '번역하여 기술(記述)한다'는 의미의 단일어(單一語)이지 '번역도 하고 저술도 한다'는 복합어(複合語)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술(著述)은 출판 용어로 '글을 써서 책을 만든다'라는 뜻이고, 작사(作詞)는 문학 용어 또는 음악 용어로 '가사를 짓는다'는 뜻인 바, 저술과 작사는 전혀 다른 영역의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책의 어디에도 노래 가사의 작사자가 별도 명기되어 있지 않는 한, 저술자를 작사자로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이에 관해 제8편 글에서 '찬미가 재판본'의 '편집 의도'를 분석하여 거기 실린 세 편의 애국찬미가가 동일인의 작사가 아님을 추정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증거에 대한 검토) 특히 14장에 실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초판본에 없던 것이 재판본에 증보 추가된 것으로, 역술자의 작사가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음을 논리적으로 규명한 바 있다.

따라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본의 경우 그 자체만으로는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을 증빙할 증거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동안 일부에 의해 기정사실(旣定事實)처럼 주장되어온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에 사실상 온전한 물적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미주 <신한민보>에 실린 '국민가' 윤치호 작(作) 증거력은 안익태의 증언으로 이미 제척(除斥)되었다

윤치호 측이 물적증거로 내세우는 또 다른 자료가 1910년 9월 21일 자 미주(美洲) <신한민보>에 실린 기사이다. 거기에 '국민가'라는 제목으로 현행 애국가 가사가 실려있고 '윤티호'라는 이름이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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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5. 미주 <신한민보> 1910년 9월 21일 자 기사.




하지만 이 자료는 '1차 증거자료'가 아니므로 다른 증거들에 의해 '윤치호 작사(作詞)'가 확실하게 규명될 경우 보충자료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윤치호 작사를 증빙하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910년 9월이면 한일합방(1910년 8월 29일) 직후인데, 1907년 완성된 이 애국가 가사가 어떤 경로로 미주에 전해져서 실리게 되었는지, 전달자는 누구이며 그가 작사자를 윤치호로 알려준 것은 어떤 정보에 의한 것인지, 또 신한민보는 그 가사의 제목을 왜 '국민가'라 했는지 등등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민가' 제목의 새 애국가 작사자가 사실은 윤치호가 아님에도 '윤치호 작사'로 실리게 된 어떤 다른 정황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假說)이다.

이 가설은 역설적으로 1910년 9월 10일 이후 미주(美洲) 동포들 사이에서 더 이상 '국민가' 가사(歌詞)의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 않은 사실에서 성립되고 있다. 말하자면 미주 동포들 사이에서는 1910년 <신한민보> 기사에 기재된 '윤티호'라는 문구가 사실과 다른 와전(訛傳)된 정보였음이 공유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설(逆說)을 증빙하는 인물이 다름아닌 안익태이다. 안익태 자서전이자 평전 격인 김경래 씨의 저서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 코리아환상곡>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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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6.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 코리아 환상곡>(김경래 지음, 현암사 펴냄)와 황사선 목사 관련 내용(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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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간 안익태가 처음 만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황사선 목사였다. 안익태는 교회당 안 태극기 앞에서 동포들이 '올드 랭 사인' 곡조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듣고 크게 감동받아 애국가를 자신의 손으로 작곡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 때 그는 황 목사로부터 애국가 가사를 소중히 받아적었는데, 황 목사는 그 가사가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詩)라고 하면서 가사의 연유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안익태는 같은 안 씨(安 氏)인 안창호 선생이 지은 가사라는 말을 듣고 반드시 작곡을 해내겠다는 각오를 더욱 다진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의 직접증언 내용이다. 황사선 목사를 비롯한 미주 동포들 사이에서는 1910년 신한민보 기사에 기재된 '윤티호 작'이라는 와전(訛傳)된 정보와는 달리 신뢰할만한 전언(傳言)에 의하여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임을 줄곧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대한민국 <애국가>의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1) 이광수·최남선·주요한 세 사람은 자신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암묵적(暗黙的)으로 윤치호 아닌 '안창호 작사설'을 증언하였다

① 이광수는 1947년 '도산 안창호'라는 책에서 "애국가는 원래 도산의 작이거니와… 선생님이 작사하신 거냐고 물으면 소이부답(笑以不答)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다시 말해 임시정부 시절 '독립'신문과 '신한청년' 주필을 맡아 도산 선생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광수는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임을 당연히 전제하고 논지를 전개하였다.

② 1955년 문교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주도한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에서 조사위원 최남선은 "가사지의 붓글씨는 윤치호 필체가 아니다"고 호통쳤다고 하며, 당 조사위원회가 누군가의 외부 압력으로 '윤치호 유력설'로 편향 판결하려 함을 감지하고 최종 표결에 불참하였다.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 산하 '청년학우회'를 이끌었고 3.1독립선언서를 기초(起草)한 최남선이 취한 행동을 볼 때, 그는 당시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안창호라고 표방(標榜)하지는 않았지만, 윤치호가 아닌 것만큼은 암묵적(暗黙的)으로 주장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③ 시인이자 언론인인 주요한은 1955년 4월 19일 자 <경향신문> 칼럼과 그 후 집필한 '안도산 전서'에서 평양 대성학원 개교 전후 윤치호의 '성자신손' 무궁화歌 가사를 안창호가 '동해물과' 무궁화歌 가사로 바꿨다는 김동원·안태국 두 사람의 전언(傳言)을 증언하였다.

김동원·안태국 두 사람의 전언이 교차검증되고, 이 가설(假說)을 대입할 경우 애국가 작사자 규명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으로 보아, 주요한의 글과 주장은 신뢰할만한 증언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2) 김구 제(題) '韓國愛國歌的故事'는 도산 안창호에 대한 묵시(默示)적 헌사(獻詞)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중국에서 발간된 악보집 '한국애국가'에는 현행 애국가의 가사와 악보가 실려있고, 김구 주석(主席)의 인물사진 밑에 '韓國愛國歌的故事=한국애국가의 유래'라는 주석(註釋)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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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7. 1945년 10월 발행된 김구 제(題) <한국애국가> 표지.




그 설명 내용 중 애국가 작사자와 관련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 애국가가 창작된 것은 50년 전 어느 한국 애국지사 한 분의 손에 의해 쓰인 것이나, 그 이름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김구 주석은 이 유래 설명에서 일명(佚名)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일명(佚名)이란 '이름을 숨긴다'는 뜻이다. 여기서 '숨긴다(佚)'는 것은 그립고 애틋해서 사모(思慕)하는 마음으로 감싸주기 위해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불어 '50년 전 어느 한국애국지사 한 분의 손에 의해 쓰였다'는 말은 1896~97년경 최초로 '무궁화노래'가 나온 시점을 가리킨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이는 1897~98년경 약관 20세에 평양 대동강변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연사로 나서 군민동락(君民同樂)·관민동락(官民同樂)·만민동락(萬民同樂)의 삼쾌(三快)를 설파한 후 탐관오리의 행색을 낱낱이 성토(聲討)하여 우레같은 박수를 받은 애국청년 안창호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김구 주석은 우리의 <애국가>가 청년 안창호의 '무궁화노래'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애국가>가 국가(國歌)를 대행함에 안창호가 이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고, 해방이 되어 이제 곧 귀국하면 가뜩이나 이념 분쟁이 심한 터에 혹시 발생할 분열을 우려하여, 도산선생 뜻에 따라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않으려는 것이 김구 주석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김구 제(題) '韓國愛國歌的故事'는 일제의 강압을 견디다 못해 먼저 가신 도산 안창호에 대한 사무치는 헌사(獻詞)였으며, 따라서 백범 김구주석은 애국가의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임을 묵시적(黙示的)으로 증언한 가장 유력한 증인인 것이다.

3) 윤정경이 채록한 전문증언(傳聞證言)들은 명백한 인적증거(人的證據)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① 김정수 권사의 목격증언

서울법대 55학번 윤정경 씨가 2005년 대학 입학 50주년 기념문집에 발표한 ''동해물과 백두산이' 시상(詩想)과 도산 안창호'라는 글은 1957년경 작은할머니 김정수로부터 들은 '목격증언'을 채록한 깜짝 놀랄 내용이다. 김정수 할머니가 그보다도 50년 전이었던 1907년에 있었던 일을 눈에 보듯 생생하게 증언했기 때문이다.

김정수 권사는 윤 씨 집안에 시집 오기 전 열세 살 때, 안창호라는 젊은 지도자가 미국에서 막 돌아와 평안도 선천예배당에 와서 집안 어른들과 주고받은 내용과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 가사를 지어 보낸 일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증언 내용은 작은할아버지 윤형관이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직접 청취한 내용 중 "윤형갑 집사(윤정경의 친할아버지)가 벼루와 지필묵을 싸 들고 평양까지 따라와서 애국가 가사를 받아 갔다"는 증언과 교차검증(cross check)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정수 권사의 증언(1907년) 중 "안창호 선생이 노랫말을 짓기 위해 이틀이나 금식기도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는 내용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황사선 목사가 안익태에게 애국가 가사를 일러주며 해준 말(1930년) "안창호 선생이 이 애국가 가사를 지으면서 이틀씩 금식기도를 했다"는 내용과 정확하게 교차검증되고 있다.

② 윤형갑의 직접 청취증언

또한 윤정경 씨가 2013년 1월 본격 발간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시상(詩想)과 도산 안창호, 대한광복군총영 태동(胎動)편'에는 안창호 선생과 애국가의 관련에 대하여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증언들이 담겨 있다. 이 책에 들어있는 전언(傳言) 중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을 증빙하는 주요 내용을 (평안도 사투리를 일부 섞어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무궁화 노래는 내(안창호)가 지었디. 밀러학당에서 병신년 '독립문 정초식'날 부를 노래를 짓자고 해서 지었는데, '무궁화 조선사람'을 왜놈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후렴을 지어 읊었디."

"선천예배당에서 예배볼 때 부른 '백두산과 두만강 물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간도 땅 되찾기 의지(意志)' 찬미가에서 '독립전쟁과 주권재민 공화국 건설'을 위한 혁명적 시상(詩想)을 떠올렸디."

"노래 가사를 나 한사람이 지은 가사에 가두지 않으면 민요처럼 퍼져서 혁명적 언어를 담은 노래도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었디. 그런데 제일 먼저 나온 개사가(改詞歌)가 주권재민과는 정반대 방향인 '님군을 섬기며'라는 구절이 들어간 윤치호 발행 '찬미가' 책자였디."

"개량 가사로 나온 것 중 제1절의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꾼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야. 한국인의 1%도 안 되는 20여만 명 예수교인의 애국찬미가를 3000만 온 겨레가 부르게 종교의 경계를 넘게 한 의의는 크다."

"'무궁화(無窮花)'는 근화(槿花)라는 식물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꽃처럼 피고 지는 억조(億兆) 창생(蒼生)을 지칭하려고 내가 생각해낸 신조어야. 무궁화는 그 당시 조선말 일상 용어에서는 쓰이지 않던 낱말이야. 그런데 정미년(1907년)에 미국에서 귀국해보니 내 뜻과는 상관없이 '무궁화'가 근화(槿花)라는 식물 지칭어로 바뀌어 불리고 있었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애국가는 내가 지었다. 박달(배달) 겨레 초유(初有)의 주권재민 혁명가 작사자로 당분간 내 이름 언급지 말고 민요처럼 정착될 때까지 원작자 미상으로 놔둬라."

"주권재민혁명 애국가가 애국민요로 되려면 다양한 생각으로 다양한 가사가 만들어지고 부침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가사가 나와야 돼. 가사 개량 자유 분위기를 위해서는 가사의 원작자를 미상인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해. 내가 지은 애국가가 민요로 정착되면 좋겠는데, 때가 익을 때까지 내가 원작자라는 것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해."
생각해보자. 윤정경 씨가 채록하여 증언한 안창호 선생의 이러한 말씀들이 이 말을 전한 윤형갑 씨나 윤정경 씨가 임의로 꾸며낼 수 있는 내용인가? 이런 말들은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직접 청취하지 않고서는 윤형갑 씨가 절대 자기 생각으로 지어낼 수 없는 내용이며, 또한 윤형갑 씨에게 이를 전해 듣고 채록한 윤정경 씨가 혼자서 아무리 꾸며내려 해도 꾸며낼 수 없는 내용이다.

윤정경 씨가 공개한 '김정수 할머니 목격증언'과 '윤형갑 할아버지 직접 청취증언'이 증거법상 증거력이 약한 단순 전문증거(傳聞證據)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증언은 상황의 구체성과 함께 상호 교차검증(cross check)되고 있어 그 증거력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는 바, 오히려 물적증거(物的證據) 못지않은 명백한 인적증거(人的證據)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4) 작사자 규명의 결정적 증거는 <애국가> 노랫말 그 자체에 들어있다

① 안창호의 <애국가> 노랫말의 실마리는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이다

안창호는 청년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개화사상가인 유길준의 영향을 받았으며, '흥사단'이라는 명칭을 계승할 만큼 그를 존경했다. 유길준이 작사한 '독립경절가'를 존중한 안창호는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하던 차에 동경에 망명 중인 유길준을 만나 그에게새로운 '애국가' 가사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으나 유길준은 사양했다.

귀국한 안창호가 선천예배당 찬미가에서 착상을 떠올리고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를 되살려 새로 지은 노랫말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현행 <애국가>이다.

유길준의 '독립경절가'에 들어있는 '장백산이 높다한들 헤아려보자(비교해보자)' '동해물이 깊다한들 헤아려보자(비교해보자)' '이 기상과 진심으로 둘을 합하여' 같은 가사들이 10여 년 후 안창호 <애국가>의 본가사 노랫말로 자리 잡은 사실은 <애국가>의 작사자가 안창호라는 강력한 물적증거(物的證據)이다.

② 현행 <애국가> 가사에는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이라는 흥사단의 4대 정신이 들어있다.

씨알사상연구소장 박재순 박사는 '애국가 작사자에게 필수적인 사상과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절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염원을 가졌는가?
둘째, '철갑을 두른 소나무'처럼 어떤 환경과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와 투쟁정신을 품었는가?
셋째, 우리 민족과 민중을 불변하는 기상(氣像)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밝은 달처럼 일편단심을 가진 존재로 보았는가?
넷째, 어떤 처지와 경우에도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결의와 다짐을 가졌는가?

그러면서 박재순 소장은 윤치호에게는 없고 안창호에게는 있는 것이 바로 이 애국가의 정신과 신념이라고 갈파(喝破)하였다.
이어 박재순 소장은 '흥사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애국가에는 안창호가 조직한 청년학우회와 흥사단의 이념과 정신인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이 담겨있다.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삶의 껍질인 물질과 욕심에 매이지 않고 삶의 알맹이인 생각과 뜻이 알차게 차오르도록 충실하자는 무실(務實)의 정신이다.

애국가 2절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는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와 도전에도 꿋꿋하게 자기를 지키고 나아가는 기개(氣槪)와 용감(勇敢)을 나타낸다.

애국가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는 나라의 주체인 국민과 국민의 한 사람인 나 자신을 향한 '곱게 물든' 마음으로 어떤 유혹과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충의(忠義)를 나타낸다.

애국가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정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는 어떤 조건과 경우에도 쉽게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한결같이 꾸준하게 정성과 힘을 다해 행동하는 역행(力行)을 나타낸다.
5) 노랫말(=歌詞)은 '짓는' 것이다

앞서 나는 '노래는 부르는 것이고, 그림은 그리는 것'이라고 설파(說破)하였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노랫말(=歌詞)은 '짓는' 것이다.

'짓는다'는 어휘(語彙)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밥을 짓는다' '집을 짓는다' '농사를 짓는다' '시(詩)를 짓는다' '죄를 짓는다' '웃음을 짓는다' 등 사전(辭典)적 의미로 볼 때 '짓는다'는 것은 '재료를 들여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이렇듯 무엇을 짓자면 반드시 그 성질에 맞는 재료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노랫말을 짓자면 작사자 머릿속에 그 노랫말 내용과 성질에 맞는 생각과 의지와 정신과 신념이 들어있어야 한다.

안창호는 애국가를 몸으로 살았다. 그의 삶과 정신 속에는 언제나 애국가가 살아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안창호가 드린 예배이고 기도이며, 비나리이고 염원이며, 투쟁이고 해방이었다.

<애국가>의 노랫말(본가사+후렴)에는 도산 안창호의 생각과 정신, 사상과 신념, 의지와 염원, 민족관과 세계관이 절절히, 고스란히 들어있다.

나는 예수교인도 흥사단원도 아니지만 자신 있게 갈파(喝破)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애국가>의 작사자는 만고의 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5. 만신창이가 된 애국가! 가사(歌詞)는 살리고 곡조(曲調)는 바꾸자

나는 열세 편에 걸친 이 글을 통해서 우리 <애국가>에 두 가지 은폐(隱蔽)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顚倒)된 사실이 있음을 밝혔다.

두 가지 은폐된 진실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과 음곡(音曲) 표절(剽竊)의 문제였고,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도산 안창호 선생 작사 사실이 윤치호 작사로 뒤집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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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8. 에키타이 안의 베를린필하모니 공연장 '만주환상곡' 지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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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은 이미 만천하에 그 사실이 공개되었다. 내가 이 연재의 첫 번째 글에서 안익태의 숨겨진 범죄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난 정황을 알랭 드롱이 주연한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마지막 장면에 비유했듯, 이제 영화(映畫 또는 榮華)는 끝나고 그 죄상에 대한 단죄(斷罪)만 남았다. 민족의 단죄이고 역사의 형벌(刑罰)이며, 오늘날 우리 국민이 내려야 할 결단(決斷)이다.

그리고 안익태 곡조의 표절 문제는 무엇보다 전문가의 감식을 거쳐 판정을 받는 과정이 선행되어야겠지만,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라는 노래의 곡조와 75% 이상의 유사도가 있음은 악보(樂譜)상 눈으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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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9. <애국가> 곡조와 '오 도브루잔스키' 곡조의 악보 비교.(김정희 교수 제공).




돌이켜보면 1930년대에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할 당시에는 표절이란 개념이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이전부터 남의 나라 민요 '올드 랭 사인'에 가사를 입혀 애국가로 부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안익태가 스코틀랜드 민요 아닌 불가리아 민요를 살려서 새로 애국가 곡조를 만들었다고 해서 크게 비난할 사람은 당시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안익태가 애국가를 새로 작곡하면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라는 불가리아 민요를 편곡(編曲)에 가깝게 활용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긴 점에 있다. 표절(剽竊)이란 단어의 절(竊)은 '몰래 훔친다' '절도(竊盜) 행각'이라는 뜻이다.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여 활용했다면 절도 행각이 아니므로 표절(剽竊)이 아닐 수 있었다. 안익태가 그 사실을 끝까지 숨겼기 때문에 절도 행각이 된 것이고 표절이 된 것이다.

오늘날 음악에 있어 표절(剽竊)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되어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에 남의 나라 곡조를 표절해서 쓰는 한심한 나라는 한 군데도 없다.

또한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반애국자의 곡조로 자기 나라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를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할 때 미주 동포들을 상대로 이렇게 공언했다.

"재래로 부르는 '애국가' 음악 곡조는 처음 스캇치의 술노래였는데, 그 후 구주(歐洲) 여러 나라에서 별별이 부르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사랑가로도 부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별가로도 부르는데, 참으로 신성한 <대한국 애국가>로서 그 곡조를 사용함은 대한국의 수치인 줄로 자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안익태가 동포들에게 한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어야 한다.

"70여 년이나 불러온 '애국가' 음악 곡조는 안익태가 작곡한 것인데, 모든 국민이 3.1절에도 부르고 광복절에도 부르고 현충일에도 부르고, 올림픽 때도 부르고 월드컵 때도 부르고 별별이 부르는데, 안익태가 친일·친나치 행각을 벌인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그 곡조가 남의 나라 민요를 표절한 혐의까지 드러나 있는데도 여전히 각급 학교나 사회에서 선생부터 학생들까지,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누구나 다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또 불러야 하는 바, 참으로 신성한 <대한민국 애국가>로서 안익태의 곡조를 사용함은 민족의 수치(羞恥)요, 국민에 대한 모멸(侮蔑)이요, 대한국의 굴욕(屈辱)인줄로 자각하였습니다."
나는 안익태 애국가 곡조는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가사는 살리고 곡조는 바꿔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는 우리 애국가를 아리랑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회 마지막 편에서 상세히 논할 것이다.

[임진택 문화운동가, 창작 판소리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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