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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매경춘추] 수줍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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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맑은 물은 가을 햇살에 반짝이고 (淥水明秋日)
남호에서 백빈을 따네 (南湖採白蘋)
꽃은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荷花嬌欲語)
배에 흔들리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네 (愁殺蕩舟人)


이백의 녹수곡(록水曲)이란 시로 호수에서 일하는 여인을 소재로 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파랗고 물은 맑다. 회광반조(回光返照)랄까. 태양이 서쪽으로 지기 전에 마지막 힘을 쓰는 듯, 강물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백빈은 흰 마름꽃이라고도 하는데 5월경에 꽃을 피우므로 가을에 따는 것은 열매가 아닐까 한다. 배를 탄 여인이 백빈을 따려고 하는데, 반쯤 오므린 꽃이 여인에게 뭔가 말을 걸고 싶어하면서도 멈칫멈칫 갸웃거린다.

수줍어하는 꽃을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정표현을 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진다. 배에 흔들린다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일 게다. 이 시의 여주인공은 말 못하는 자기 자신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첫날밤에 눈물짓는 갑돌이와 갑순이같이….

그 당시는 왜 이렇게 감정표현을 쑥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순수해서일까. 겸손을 강조하는 유교교육 때문일까. 옛날에는 예쁘다고 하면 아가씨들은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했다. 자기 자랑을 금기시했고 회의장에서 명패가 없으면 가장자리에 앉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현대는 자기 PR의 시대다. 자신을 알리는 것이 지상과업인 양 자기표현을 당당하게 하고 자기를 봐달라고 야단이다. 아가씨들의 핫팬츠나 미니스커트도 자기 PR의 산물인지 모른다. 신입사원들의 자기소개서를 보면 슈퍼맨이나 슈퍼우먼처럼 느껴진다. 자기 장점만 빼곡히 들어 있다.

현대 사회는 울어야 하고 자기 주장을 해야 하는가 보다. "우는 아이 젖 준다. 인사 철에 로비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다"는 주장이 진리가 되고 있다. 자기 일만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언젠가 알아줄 거라는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위에서 알아서 해주는 시대는 영영 가버린 것인가. 니체가 말했듯이 신이 죽어버렸으니 누가 봐줄 것인가.

그래도 옛 성현의 말을 믿고 싶다. 중용에 '막현호은 막현호미(莫見乎隱 莫顯乎微)'란 말이 있다. 숨기고 내숭을 떨어도 다 보이고 은밀한 것일수록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되찾았으면 한다. 짐승에는 없는 착한마음(羞惡·辭讓之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지도자들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을 알아주는 리더십을 발휘했으면 한다.

[김상규 동국대 석좌교수(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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