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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인-잇] 부모의 이혼, 아이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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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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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 선생님, 부부의 세계 보셨어요? 전 옛날 일이 떠올라서 힘들었어요. 잠깐 봤는데, 더는 못 보겠더라고요."

"부부의 세계 안 봐? 그저 자극적인 드라마들하고는 달라. 사람들 심리 흐름이 정말 입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이야.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를 보는 것 같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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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대체 어떤 드라마길래 다들 이렇게 난리인거야?'

내담자분들, 동료 의사들, 지인들까지. 진료실 안팎에서 들려오는 얘기 때문이라도 드라마 보기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첫 방송이 시작되고 한참을 지나 유료 결제까지 하며 보기 시작한 부부의 세계는 정말이지 와...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동료 의사들 말대로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진료실에서 만나본 사람들 같았다. 배우자의 외도로 상처받은 사람, 외도 중인 사람, 이혼 과정 중에 있는 사람, 이혼 후폭풍에 괴로워하는 사람, 미혼으로 힘든 사람, 트라우마에 갇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등등..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너무 힘들겠다"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오는 그는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풍파 속에 변해가는 사춘기 아이 준영이었다. 나는 왜 이 아이에게 마음이 제일 쓰였던 걸까?

드라마 속 준영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하니, 전공의 시절 병원에서 입원 환자로 만났던 한 아이가 떠올랐다. 아마도 준영이와 그 아이가 많은 부분이 겹쳐서 일테다. 나이도 비슷했고, 부모님 이혼 후 한부모와 사는 것, 같이 사는 쪽의 부모가 의사였다는 점까지 같았다. 가정이 무너지기 전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던 아이가 부모님 이혼 후 심한 우울감과 폭식, 그리고 구토를 반복하는 식이장애 증상으로 입원 치료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치료 과정은 원활하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상담에 협조적이지 않았고, 나는 그 아이의 닫힌 마음을 끝내 열지 못했다.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깊게 나눈 대화 자체가 드물었다. 하지만 1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아이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꽤나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주간을 담당 의사로 지낸 내가 전혀 몰랐던 증상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도벽이었다. 입원 기간 동안 병원 내 매점에서도 수십만 원어치의 간식을 훔쳤던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나 역시 처음 겪어본 일이라 크게 당황했었고 실망과 배신감을 크게 느꼈었다.

그런데 부부의 세계 속 준영이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 그것엔 실망과 배신감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힘들다는 것을. 그 아이가 어른들에게 느꼈을 그 감정의 크기에 비하면 한없이 작을테니까. 상처받은 아이에게 내 나름 따뜻하게 건넨 말들은 아이의 상실감을 채우기엔 한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아이는 훔친 간식들을 대부분 먹지도 않았었다. 다른 환자들에게 다 나눠주거나, 침대 구석 같은 곳에 숨겨두었었다. 이 역시 드라마 속 준영이와 겹치는 모습이었다. 이 아이에게 도벽은 어떤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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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영이에게 도벽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진은 드라마 '부부의 세계' 스틸컷)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봤을 때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물건을 훔치는 그 순간이, 무너져가는 자신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통제감을 느끼는 순간이었을 수 있다. 더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을 망친 부모에게 감정적 고통을 안겨주려는 무의식적 복수였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더 걱정스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모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고, 이를 통해 가정이 다시 합쳐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심이 숨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런 가설들이 다 의미 없게, 너무나 우울해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그 시기에 유일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도벽에 중독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정답은 모른다. 그때 더 깊게 그 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도벽이라는 증상을 만들어낸 심리적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더 중요한 건, 이런 증상들이 이혼 전에는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병원에서 만났던 아이도, 드라마 속 준영이도, 모두 부모의 이혼 때문에 생긴 애먼 피해자들이다.

물론 모든 이혼 가정에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가정 내 문제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면피 받을 수도 있다. 별다른 문제없이 훌륭하게 극복해내는 아이들도 많다. 드라마 속에서 또 하나의 이혼 가정 아이로 등장하는 노을이도 준영이의 도벽을 목격한 후 이렇게 외친다. "네가 이러면 한부모 가정 아이들은 다 이상하다고 욕 먹이는 거라고!"

아무리 부모의 이혼 때문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비행을 저지르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준영이를 비난하는 시청자들의 반응들도 자주 보였다.

하지만 부모의 이혼을 겪은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는 것을 모두가 꼭 알았으면 한다.

아직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혼자서 살아갈 심리적 독립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가정의 붕괴는 말 그대로 자신과 세계의 동시 붕괴 상황이다. 그 무엇보다 큰 불안과 공포이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증상들도 생겨날 수 있다. 도벽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너무 안타깝게도 그 충격의 여파가 잠깐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그래서 난 부부의 세계가 반가웠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와 행동을 노골적으로 그려낸 것이 반가웠다. 이 정도의 강한 자극이어야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테니까. 뇌리에 남은 기억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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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이혼을 겪은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사진은 드라마 '부부의 세계' 스틸컷)


전공의 때 만났던 그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부부의 세계를 봤을까? 봤다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을까? 그 아이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너무나 부족했던 그때의 내가 너를 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가장 먼저 하고 싶다.

시간이 흐르면서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렸기를, 그 틈으로 따뜻한 온기를 품은 누군가 들어왔기를, 지금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났기를, 그리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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