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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밀실]"아이 굶어죽을까 포기"···눈물쏟던 미혼부 마지막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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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미혼부를 만나다





밀실은 ‘중앙일보 레니얼 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도있는 착 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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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부 정모(24)씨의 누나가 운영하는 식당 한 켠에 유아용 의자가 놓여 있다. 정유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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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하더라고요." ‘엄마’ ‘맘마’ ‘안녕’…. 생후 14개월 아들이 제일 먼저 입을 뗀 단어입니다. 24살 정모씨는 아직 ‘아빠’ 소리를 듣지 못 했습니다. "서운하진 않아요. 곧 아빠도 하겠죠."

정씨는 '미혼부'입니다. 아이 외할머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됐고, 엄마는 "아이를 키울 생각이 없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죠.

22일 찾아간 전남 순천의 한 식당, 드럼통 테이블 옆 한 켠에 뽀로로가 그려진 장난감 버스와 분유 두 통이 보입니다. 하늘색 유아용 의자도 세워져 있습니다. 돌잔치 때 썼던 파란 풍선도 여전히 매달려 있습니다. 이곳은 정씨가 하나뿐인 아들과 놀아주는 작은 놀이방입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까진 맡길 데가 마땅치 않아 누나가 운영하는 식당 한 켠에 자리를 잡았죠. 그렇게 두 부자(父子)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출생신고부터 막히는 미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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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아이 돌잔치 때 쓴 풍선과 장난감 버스. 정유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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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아빠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정씨처럼 엄마가 아이를 두고 떠난 미혼부들이죠. 미혼부의 육아는 시작부터 험난합니다. 아이를 우리나라 국민으로 등록하는 출생신고부터 가로막히기 때문인데요.

정씨는 "출생신고를 하려면 법원에서 '아이 엄마가 누군지 모른다'고 거짓말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출생증명서에 아이 엄마 이름이 나와 있는데 어떻게 잡아떼겠어요. 아이는 분명 여기 있는데 아직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습니다. 일찌감치 아들을 태민(가명)이로 불렀지만, 법적으론 이름이 없습니다.

"제가 키우기로 선택한 건데 아이가 피해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죠. 답답한 마음에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려보고, 방송에도 출연했지만 달라진 게 없어요."



이름 없는 아이들… 기본권조차 보장 못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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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이 발표한 미혼부 현황. 이지수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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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이 정의하는 미혼부는 '만 18세 이하 자녀를 양육하는 법적으로 미혼인 아버지'입니다. 이혼, 별거 등으로 아이를 혼자 키우는 '싱글대디'와는 다릅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2018년 전국의 미혼부는 7768명입니다. 같은 해 미혼모(2만1254명)의 3분의1 정도죠.

하지만 통계엔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미혼부가 빠진건데요. 미혼부 숫자가 매년 감소한다고 보기만은 어려운 이유입니다. 학계에선 통계 밖 미혼부까지 다 합쳤을 때 그 숫자를 최대 3만명으로 보고 있죠.

미혼부 현황 파악보다 더 큰 문제는 자녀들의 기본권 침해입니다. 출생신고를 못 한 아이들은 의료·복지·교육 등 최소한의 권리를 오롯이 누릴 수 없습니다. 건강보험은 생후 12개월까지만 적용됩니다. 주민센터에서 사회복지전산관리번호를 발급받기 전까진 양육비 지원에서도 배제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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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밀실팀이 만난 미혼부 정모(24)씨. 백경민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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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도 경제적 부담을 토로합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터로 나서지만, 육아와 직장을 모두 챙기긴 버겁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숨을 잘 못 쉬어서 10일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병원비 부담 때문에 아이가 또 크게 아프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합니다. 아이가 또래보다 잘 먹어서 분유 값도 일주일에 10만원 넘게 쓰고 있어요."



엄마의 출생신고 거부에 '학대' 고소 택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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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지난해 5월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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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미혼부들은 왜 출생신고를 할 수 없을까요. 현행법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출생신고는 엄마가 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죠. 정씨가 주민센터를 찾아갔을 때 돌아온 답은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법원에 가보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정법원을 찾은 정씨는 또 낙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출생신고를 거부했기 때문이죠.

미혼부가 자녀를 출생신고하려면 엄마의 이름·주민등록번호·등록기준지(주소)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아이 엄마가 미혼임을 증명할 수 있는 혼인관계증명서까지 필요하죠. 아이 엄마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만큼 정씨의 답답함도 커져만 갑니다.

"아이 엄마가 출산 기록을 남기는 게 부담스러운지 혼인관계증명서 제출을 계속 거부하고 있어요. 출생신고가 늦어지니 필요한 지원도 못 받고 아이만 힘들어지는 게 아닌지…."

결국 정씨는 고육지책을 택했습니다. 지난 3월 아이 엄마를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서에 고소한 겁니다. 엄마가 직접 출생신고를 하게끔 유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사랑이법' 시행됐지만…사각지대 여전히 넓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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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혼부가정지원협회 '아품' 대표 김지환(43)씨와 그의 딸 사랑이. 김지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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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희망을 품고 출생신고에 나섰던 이유는 이른바 '사랑이법' 때문입니다. 6년 전 미혼부 김지환(43)씨가 "딸 사랑이의 출생신고를 하게 해달라"며 1인 시위를 벌인 뒤 통과된 법안이죠.

김씨의 노력 덕분에 미혼부가 아이 엄마의 인적사항을 모를 경우 가정법원 확인을 받아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한 가족관계등록법(제57조 2항 신설)이 2015년 11월부터 시행됐습니다.

하지만 정씨처럼 아이 엄마의 인적사항을 알고 있는 경우 사랑이법의 적용을 받지 못합니다. 이름 같은 기본적인 정보만 알고 있어도 사랑이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법원이 판결한 사례가 있을 정도죠.



울면서 전화 건 미혼부…"그냥 아기 포기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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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품' 대표 김지환(43)씨가 지난해 12월 미혼부 출생신고를 위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김지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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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더는 못하겠어요. 제가 데리고 있어봤자 아이가 굶어죽을 것 같아요. 그냥 포기할래요." 김지환씨는 4년 전 자신이 도왔던 미혼부 A씨에게 걸려온 전화를 잊지 못 합니다. 30대 중반이었던 A씨는 혼자 아이를 키우며 출생신고 절차를 밟다가 끝내 포기했습니다.

아이 엄마는 잠적해버렸고, 아이 맡길 데가 없으니 하던 일도 관둬야 했습니다. 생활고는 계속되는데 출생신고 소송은 더디기만 했죠. 지친 A씨가 울면서 김씨에게 전화를 건 겁니다.

그게 A씨와의 마지막 통화였습니다.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고요. 김씨는 "아이를 데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두려워 며칠간 뉴스를 계속 확인했다"며 "하루하루 아이 먹일 분유랑 기저귀 값 벌기에도 벅찬 미혼부에게 출생신고 소송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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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법'이 시행됐지만 미혼부는 여전히 출생신고에 어려움을 겪는다. 백경민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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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부의 편의가 아닌 아이의 권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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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전 세종시 연양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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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태어난 아이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사랑이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정훈태 변호사(법률사무소 승소)는 "출생신고 관련 법 조항은 과거 유전자 검사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만들어진 것"이라며 "유전자 검사법 발달로 아빠와 아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힐 수 있게 된 만큼 가족관계등록법의 전면적인 개정을 고려할 때"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다른 사랑이는 전국에서 커가고 있습니다. 정씨에게 아이가 생기기 전과 후에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저밖에 몰랐죠. 옷 사 입는 걸 좋아해서 월급이 들어오면 저만을 위해 썼어요. 요즘엔 철 지난 옷을 돌려 입어도 행복해요. 이제 아이가 저의 100%예요."

박건·최연수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백경민·이지수·정유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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