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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화)

[충무로에서] 스웨덴 집단면역 실험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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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알았다. 어렸을 때 즐겨 봤던 '말괄량이 삐삐'가 스웨덴 작품이라는 것을. 2005년 이 소설을 집필한 작가는 '말괄량이 삐삐'의 성인 버전으로 사회부적응자지만 천재적인 해킹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을 창조했다고 한다. 사회 편견쯤은 씹어 먹을 듯한 무표정한 그가 강한 여자를 동경하는 '걸 크러시'의 원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0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기후변화에 재빨리 대응하라며 호통을 친 10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도 삐삐의 기개를 닮은 것이 아닐까.

코로나19 사태에서 스웨덴은 다시 한번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전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국경을 폐쇄하고 봉쇄 전략을 펼칠 때 스웨덴은 일상과 자유를 택했다. 마스크 사용 강제도, 휴교령도 없었다. 중국식 톱다운 봉쇄가 아니라 사회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에 참여하는 보텀업 방식도 논란이었지만 더 거센 비판은 스웨덴이 '집단면역'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는 의구심으로 향했다. 인구 대부분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항체가 생기면 전염병 확산이 어려워 집단면역에 이른다는 이론이다. 바이러스 확산을 사실상 방치하는 것으로 건강한 사람이야 문제가 없지만, 면역력이 취약한 노인이나 기저질환자에겐 치명적인 전략이다.

20일 현재 월드오미터 집계에 따르면 스웨덴 코로나19 확진자는 3만명에 사망자는 3700명 수준이다. 이웃 국가인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보다 최소 3배나 많은 수치다. 인구 100만명당 사망자 수를 비교하면 스웨덴은 371명으로 벨기에, 스페인 등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높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스웨덴 내부에선 큰 동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3분의 2가 자율성을 강조한 정부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공중보건 선진국이라는 자긍심도 높다. 코로나19 대응을 진두지휘하는 안데르스 테그넬 스웨덴 공공보건청장은 한 인터뷰에서 "백신이 나오지 않는 한 스웨덴 모델이 가장 지속 가능하다"며 "스톡홀름 시민 40~60%가 다음달이 되면 집단면역에 돌입한다"고 주장했다.

스웨덴 실험이 성공할지는 결국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경고처럼 코로나19가 에이즈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면 결국 바이러스와 공존을 택한 스웨덴의 방식이 현명했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집단면역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희생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스웨덴이 복지나 기후, 젠더 이슈에서 앞서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국민 생명을 담보로 '잔인한 실험'을 감행했다는 오명은 떨치기 어려울 것 같다.

[국제부 = 이향휘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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