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유가 사상 첫 마이너스
‘원유를 사 주기만 하면 돈까지 얹어주겠다’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수요 부족, 공급 과잉, 선물 거래 마감일이라는 3요소가 한꺼번에 겹쳤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5월 인도분 선물을 처분하지 못해 발생한 일시적 폭락이다. 하지만 원유의 ‘수요 붕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세계 경제가 얼어붙으면서 유가가 재차 마이너스(―)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원유 수요 붕괴, 마이너스 유가 재발할 수도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북해산 브렌트유, 중동산 두바이유와 함께 세계 3대 유종으로 불린다. WTI와 브렌트유는 선물 시장에서 거래되며, 두바이유는 현물로만 거래가 이루어진다. 선물은 통상 월 단위로 거래된다.
5월 인도분 WTI 선물의 거래 만기일은 21일(현지 시간)이다. 원유 선물 거래에 참여하는 투자자들은 선물을 활용해 거래 만기일 이후 현물로 넘겨받거나, 6월 선물로 바꿔 보유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원유 현물을 넘겨받아도 되살 수요가 없어 이를 보관하기 위한 비용이 발생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원유 저장 수요 증가로 초대형 유조선(VLCC) 6개의 월 임대료가 1년 전 하루 2만9000달러에서 최근 약 10만 달러로 늘었다. 게다가 수요가 언제 회복될지 몰라 재고를 떠안을 기간을 예측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투자자들은 대부분 다음 달 선물로 갈아탔고, 이 과정에서 5월 인도분 WTI 선물 매수세가 전무하다 보니 가격이 폭락했다.
5월 인도분 선물의 마이너스 가격 여진은 다른 선물과 유종(油種)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1일 WTI 6월물과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도 20달러 지지선이 깨지면서 동반 급락세다. 6월물은 아직 만기가 남아 있어 가격이 일정 수준 유지될 것으로 봤지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기 회복 신호가 확인되지 않는 한 유가 하락 압력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당장 6월 인도분 선물 만기일을 앞두고 유가가 다시 고꾸라질 수 있다. 미 경제매체 포브스는 “수요 붕괴 상황에서 유가에 바닥이 없다는 게 확인됐다. 마이너스 유가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 에너지 업계 줄파산 우려
생산된 원유를 저장할 공간도 조만간 한계에 부딪힐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미국 최대 내륙 원유 저장지대인 오클라호마주 쿠싱의 수용량이 10일 기준 70%에 육박하는 등 미 전역의 저장 능력은 57% 수준에 이르렀다. 재고 증가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자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의 저장시설 한도가 2주 안에 다 찰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고 전했다.
일단 미국은 유가 급락에 대응해 전략비축유(SPR) 카드를 꺼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일(현지 시간) “기록적으로 낮은 유가에 근거해 전략비축유 7500만 배럴을 구입해 저장량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OPEC플러스(석유수출국기구와 10개 주요 산유국 협의체)가 역대 최대인 하루 970만 배럴 감산을 합의했음에도 가격 하락을 막지 못하는 만큼 산유국들이 추가 조치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저유가가 계속되면 에너지 업계의 생태계가 흔들릴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SK증권은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 최대 석유 거래사인 힌레옹그룹이 17일 채무상환유예(모라토리엄)를 신청했다”며 “석유 관련 회사들의 신용 리스크가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CNN비즈니스는 미 에너지 업계가 ‘최후의 심판 시나리오’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특히 경제 호황기에 은행에서 많은 대출을 받아 생산을 늘려온 셰일 기업의 파산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리스태드에너지는 “WTI가 배럴당 20달러로 떨어지면 미 유전 탐사 및 원유 생산 회사 533곳이 내년 말까지 파산보호를 신청할 것”이라며 “유가가 10달러로 떨어지면 파산보호 신청 회사가 1100곳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각에선 에너지 회사들이 파산하면 여기에 투자한 금융회사들도 덩달아 타격을 입어 새로운 금융위기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 뉴욕=박용 특파원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