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기본소득과 재난지원금, 그 줄다리기 사이에서 깨져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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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통의 미덕은 방어력입니다. '쨍그랑 한 푼' 모은 소중한 자산을 동생의 야습, 아버지의 약탈로부터 지켜야 함은 물론이고, 스스로 뻗치는 지름의 유혹으로부터도 굳건히 버틸 수 있어야 저금통 본연의 자산 적립 임무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깨지 않고서는 열 도리가 없는 도자기 돼지 저금통은 그야말로 아름답습니다.
기획재정부는 정부의 저금통입니다. '곳간 지기' 기재부 예산실은 깎는 것을 미덕으로 삼습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자신을 '재정을 지키는 주무장관'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나랏돈을 쓰자고 들면 꼬장꼬장한 기재부 예산실의 '우주 방어'를 뚫어야 합니다. 9개월 남은 내년도 예산을 검토하기 위한 편성 지침이 이미 지난 24일에 벌써 나갔을 정도로 나랏돈 쓰는 과정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렇다 보니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전 국민에게 돈을 뿌려주자는 '기본소득'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기재부의 반응을 간단히 묘사하자면 "ㅎㅎ"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농담도 ㅎㅎ" 또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등으로 다양하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홍남기 부총리도 "모든 국민에게 주는 것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며 명백한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1) 국민 공감대가 부족하고 2) 재정 건전성을 위협하고 3) 돈 쓰는 만큼 효과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세계적인 확산과 이에 따르는 경제 영향이 정말 심상치 않습니다. 어려워진 세계 수출, 멈춰버린 관광 시장, '사회적 거리두기'로 위축된 소비, 손님이 끊긴 자영업자, 그에 따라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사람들. 코로나19는 경제의 맥을 하나하나 끊어가고 있고, 그 피해가 앞으로 얼마나 커질지 짐작도 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재정으로 국민의 기본적인 소득을 보전해주는 재난 지원금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도 구체화하고 있고 홍콩 등 일부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정책도 나왔습니다.
우리 정부도 움직였습니다. 30일 열린 비상경제회의에서 정부는 나랏돈 7조 원, 올해 예산(512조 원)의 1.3% 수준을 국민에게 나눠주는 긴급 재난지원금 지급 방안을 전격 확정했습니다. 소득 하위 70% 가구를 대상으로 4인 가구 기준 100만 원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발표된 내용이 어딘가 이상합니다.
*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 우리도 100만 원 받을 수 있을까? "안알랴줌"
100만 원 소식을 듣고 누구나 드는 생각은 "오! 나도 받을 수 있나?"일 겁니다. 그리고 "언제 주지? 어디 가면 받을 수 있지?"가 뒤를 잇습니다. "어디다 쓰지?"는 받고 나서 생각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저도, 정부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모두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지 않은 채 방향만 내놨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내용은 딱 이 정도입니다.
- 소득 하위 70%, 약 1,400만 가구에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다. - 1인 가구는 40만 원, 2인 가구는 60만 원, 3인 가구는 80만 원, 4인 이상 가구는 100만 원씩 지급한다. - 현금 지원이 아닌 지역 상품권·전자화폐 등 쿠폰으로 지급해 소비를 진작한다. - 추정 비용 9.1조 원 중 정부가 약 80%인 7.1조 원을 부담하고 지방자치단체가 2조 원을 부담한다. (서울은 지방 재정이 풍족하니 80%보다 덜 지원한다.) - 재원은 올해 예산에서 안 쓸 것 같은 돈을 빼내는 2차 추경을 통해 마련한다. 정 부족하면 적자국채를 더 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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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소득 하위 70%에 속할까?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뭘 기준으로 70%를 자를지 앞으로 결정해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아직 모릅니다. 이 돈은 오는 4월 15일 총선에서 뽑힌 21대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모여서 2차 추경 예산안을 검토하고 합의해 통과시킨 다음에나 집행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안 정해졌습니다. 사용 기한은? 안 정해졌습니다.
정부가 국민 70%에 영향을 미치는 대책을 이렇게 미흡하게 준비해 내놓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급한 대책이니 우선 방향만 밝혔다"고 하기에는 방향을 밝혔을 때 실익이 별로 없습니다. 국민의 협조를 구해야 할 방역정책도 아니고, 이 발표만으로 소비가 자극될 리도 없습니다.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보자'기엔 너무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쓰기만 해'라는 식입니다. 다만 한 가지, 총선을 앞둔 여권이 얻을 정치적 이익은 또렷합니다.
● 정부는 왜 그랬을까?
이번 지원금으로 얼추 4명 중에서 3명은 정부가 주는 상품권을 받게 됩니다. 선별 비용이 적게 드는 보편적인 기본소득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원이 적게 드는 선별 지원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이 범위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처음부터 기본소득을 반대한 기재부는 소득에 따른 광범위한 선별지원에도 부정적인 입장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득 하위 50%에 가까운 중위소득 100% 가구만 지원하는 방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는데, 여당과 청와대의 요구에 최종안에서는 지원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거칠게 계산해서 지원 대상자 1인당 재원이 25만 원이 든다고 치면 전 국민 5,170만 명에게 '기본소득'을 지원하는 데는 12.9조 원, 기재부 방안대로 절반만 주면 6.4조 원가량이 듭니다. 최종안인 70%로 결정되면서 드는 재원은 그 가운데인 9.1조 원쯤으로 추산됩니다.
50% | 70% | 100% |
6.4조 원 | 9.1조 원 | 12.9조 원 |
문재인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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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원 대상을 확대한 이유를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국민이 고통받았고 모든 국민이 함께 방역에 참여했습니다. 모든 국민이 고통과 노력에 대해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소득 상위 30%에 대해서는 소득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지원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은 설명입니다. 소득 상위 30% 국민들이 방역에 협조하지 않았다고도,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동시에 "정부로서는 끝을 알 수 없는 경제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재정 여력을 최대한 비축할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소득 하위 70% 모두에게 수조 원의 재정지원을 하는 건 다소 무모해 보입니다. 수십만 원의 소득 지원이 도움이 될 정도로 극심한 타격을 입은 사람이 국민 3/4에 이를 정도로 보긴 어렵기 때문입니다.
소비 진작으로 경기를 살리는 효과가 얼마나 날지도 걱정입니다. 받은 상품권이야 쓰겠지만, 안 살 물건까지 더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홍남기 부총리도 브리핑에서 "(소비 진작)효과가 어느 정도일지에 대한 계량적인 수치는 조금 더 점검을 해봐야 한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습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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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가 고령자, 기저 질환자에게 치명률이 높은 것과 비슷하게 경제 위기로 인한 타격은 취약 계층이 늘 더 많이 받습니다. 쪼그라든 경제 상황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만큼 재정 집행도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대량 실업이나 추가적인 경기 부양 필요성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송태경 민생연대 사무처장은 SNS를 통해 건설일용노동자나 특수고용 노동자 등 취약한 노동 환경에서 일자리를 잃게 될 사람들에 대한 정밀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실제 경제적 재난에 처한 분들은 다른 모든 분들과 마찬가지로 긴급재난지원금 1회 지원에 만족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정부의 지원책은 비록 '답정너'로 발표되긴 했지만 구체화하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여지를 앞두고 있습니다. 우선 1) 보건복지부가 지원 대상을 정해야 하고 2) 정부가 추경안을 확정해야 하고 3) 총선을 치러야 하고 4) 국회에서 최종 추경안을 결정해야 합니다. 코로나19의 진행 상황이 급변하는 만큼 실제 집행될 5월까지 그 내용, 방향까지도 바뀔 여지가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토론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맞이할 사회 정책의 큰 변화에 중요한 토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화강윤 기자(hwak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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