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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시조가 있는 아침] ⑬ 얼어 잘까? 녹아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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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얼어 잘까? 녹아 잘까?

-임제 (1549~1587)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집을 나니

산 위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무슨 말? 녹아 자야지

조선의 3대 천재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평양에서 기생 한우(寒雨)를 만났다. ‘찬비’라는 그녀의 이름에 빗대 백호가 시조 한 수를 노래한다.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해학이다. 명기 한우가 그냥 있을 리 없다. 즉석에서 시조로 받아치니 이런 노래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찬비를 맞았으면 녹아 자야지 원앙을 수놓은 베개. 비취 빛 이불 다 두고 얼어 잔다니 왠 말이냐는 것이다. 이날 이 남녀가 어떤 밤을 보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서북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가 파직당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을 시작했다. 검(劍)과 피리, 술과 여인, 친구를 좋아했다.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로 죽을 때 조선이 중국의 속국과 같은 형태로 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곡을 하지 못하게 했으니 ‘물곡사(勿哭辭)’라 한다. 호암 문일평은 이를 ‘위대한 임종’이라고 했다.

유자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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