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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정말 민주당을 빼려면,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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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민주당은 어떤 정당인가?

민주당은 어떤 정당인가?

<경향신문>에 임미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가 "민주당만 빼고"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칼럼을 더불어민주당이 문제 삼으면서 새삼 이 당의 정체와 행태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이미 이 지면에서 더불어민주당을 한국의 '리버럴 세력'이라 규정하고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의 시대에 리버럴 세력이야말로 사회 변혁의 걸림돌이라 비판한 바 있다("'구질서' 악화 막겠다며 '신질서' 태동 막는 리버럴", 2019. 12. 25).

하지만 모처럼 한국의 현 여당이 도대체 어떤 정당인지를 놓고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니 이 한국형 리버럴 정당을 한국 사회의 보다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다시 뜯어보고자 한다. 리버럴 정당의 실패와 한계에 맞서며 마땅히 그 대안으로 부상해야 할 진보정당운동이 '리버럴 정당 2중대'라는 오랜 굴레에서 벗어나 민주적 생태적 사회주의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이런 분석과 비판, 성찰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의 유산 - 김대중주의

대한민국 리버럴 정당의 출발점은 한국민주당이다. 분단의 비극에 커다란 책임을 지닌 친일파와 지주 계급의 정당 한국민주당에서 출발해, 이승만 정권 시기의 민주당으로 이어졌다가, 4월 혁명 직후에 잠시 집권했고,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민주공화당에 맞서는 야당으로 존재했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유일 야당의 성격은 1987년 6월 항쟁 때까지 이어졌고,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의 결별 그리고 김영삼 세력의 민주자유당 합류로 혼란기를 맞게 된다.

70년이 넘는 긴 세월이다. 이 기간 동안 면면히 이어진 전통이나 특성도 없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역사의 부침에 따라 몇 차례 크게 재편되기도 했다. 비록 인적으로 뚜렷이 이어지더라도 이승만 정권 시기의 민주당이 다르고, 군부 독재 시기의 신민당이 또 다르다. 따라서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논하려면, 한국민주당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한국 리버럴 정당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의 심각한 재편이 언제 있었는지 식별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 시점은 19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과 '국민의 정부' 출범이다. 1990년부터 이때까지 민주자유당 반대쪽 정치 공간은 혼란스러운 재편 과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김대중이 '삼김청산'이나 '세대교체'를 외치는 도전자들을 제압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한국 리버럴 세력의 핵심과 외연을 재정리했다. 이렇게 전열을 정비한 리버럴 세력은 외환위기와 동시에 전개된 1997년 대선을 통해 마침내 집권에 성공했고, 집권 뒤에는 경제 위기 대응에 골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특성이 굳어졌다.

첫째, 사회운동의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흡수다. 그 전에 김영삼 정권도 '재야'라 불리던 민주화운동 인사 일부를 영입했고, 야당이던 김대중 세력도 위기에 몰릴 때마다 재야 명망가들을 끌어들여 외연을 확대하곤 했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 출범 후에 나타난 흐름에 비하면, 이들은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민주화운동 주류가 아예 정부-여당의 한 축이 됐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중진인 86세대 정치인들도 이때 합류해 2000년 총선을 통해 원내에 진출했다. 이후 온건-주류 사회운동은 줄곧 리버럴 정당의 중요한 토대가 되어주었다.

둘째, 이렇게 사회운동 세력을 흡수했음에도 민주화와 사회 개혁의 거리는 오히려 멀어지기만 했다.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는, 군부 독재 아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수 야당들이 사회 개혁의 목소리를 일정하게 대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항쟁의 여진이 약해질수록 이들은 점차 전 세계적인 시장지상주의 기류에서 벗어나는 개혁 요구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런 양상은 이미 김대중의 경제 정책 기조 변화를 통해 예고되었다. 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박정희식 산업화에 맞서는 총체적인 대안으로 '대중경제'론을 제시했다. 대중경제연구소가 편저자로 돼 있는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범우사, 1971)은 진보 경제학자 박현채가 실제 저자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당대 남반구 좌파의 탈종속-자립경제 구축 전망과 유사한 구상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미국 망명 중에 김대중의 경제 사상은 변화했다. 미국에서 쓴 논문을 우리말로 옮긴 <대중경제론>(청사, 1986)은 여전히 '민주적 계획'이나 '대중참여경제' 같은 언어를 구사하기는 했지만, 강조점은 시장 기능 확대, 국가 개입 축소에 있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을 풍미하던 초기 신자유주의 이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다음 문구가 지금까지도 한국 지성사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김대중의 시대 인식을 잘 드러낸다.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는 정의의 관념에 있어서는 훌륭하나 상당 기업의 국유화, 지나친 사회보장제도 등으로 경제 발전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음은 우리가 목격한 대로이다. 이것이 지금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사회보장제도의 절제, 자유경쟁제도의 강화 등의 방향으로 정책 수정을 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대중경제론> 6쪽)

이런 점진적인 내부 변화에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이라는 급진적인 외부 압력이 더해졌다. IMF는 1970년대 이후 각국 외환-외채위기에 대해 쭉 그래왔듯이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른바 구조개혁을 요구했다. 김대중 정부는 IMF가 요구한 4대 부문(기업, 금융, 공공, 노동) 개혁을 앞장서서 집행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대중경제론>에서 밝힌 경제의 '민주적' 운용과 동일시했다. 이후 리버럴 세력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의 틀 안에서 경제사회 정책을 펼쳤다. 그러면서 시장 기능을 확대하는 '자유화'를 마치 '민주화'와 같은 내용인 것처럼 치켜세웠다.

셋째, 사회 개혁 대신에 정권의 역량을 집중한 분야는 남북관계였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6. 29 선언'이라는 거대한 성과를 이뤄냈다. 김대중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에 대해 독창적인 구상과 의지, 능력을 지닌 보기 드문 정치가였다. 일단 남북관계가 크게 진전되자 이런 김대중의 비전이 리버럴 세력 전체의 이념-정책적 구심으로 자리 잡았다. 남한 내 극우 세력의 반발이 거세지고 다른 한편 신자유주의 구조개혁 때문에 빈부 격차가 심해질수록 리버럴 세력은 이 유일한 치적, 남북관계에 더욱 집착하게 됐다.

김대중 정부 5년을 경과하면서 위의 요소들은 점차 한국 리버럴 세력이 딛고 선 공통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일단 이 패러다임을 그 출발점이 된 걸출한 정치가의 이름을 따 '김대중주의'라 부르겠다. 김대중주의는 국민의 정부뿐만 아니라 후속 정권인 '참여 정부'에서도 그 골격이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이어졌다.

참여 정부의 유산 - 중산층 이반 트라우마

사실 현재 정부-여당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전 대통령은 김대중이 아니라 노무현이다. 더불어민주당 주류는 최근까지도 '친문(재인)'에 더해 '친노(무현)'라 불렸다. 그러고 보면 더불어민주당을 논하며 '김대중주의'보다는 '노무현주의'를 이야기하는 게 더 맞지 않나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노무현 정부는 정책 기조 면에서 김대중주의를 벗어난 행보를 보인 적이 별로 없다. 노무현주의란 없다. 김대중주의의 계승과 변형이 있을 뿐이다. 다만 노무현 정부의 역사적 경험이 한국 리버럴 세력에게 남긴 뚜렷한 자취가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것은 중산층 이반 트라우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데는 중산층에 새로 합류한 대졸 학력 86세대의 열광적인 지지가 한 몫 했다. 이들은 정치 영역에서는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져 제6공화국 출범 이후의 점진적 민주화 기조를 이어가려 했다. 반면 '먹고 사는' 문제에서는 외환위기로 굳어진 이중 노동시장에서 자신들이 쥐고 있던 기득권에 집착했고, 앞 세대 '강남 중산층'이 열어놓은 삶의 방식을 뒤쫓으며 부동산 자산 형성과 자녀 입시-학벌 경쟁을 통해 중산층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후반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정부-여당 지지층이 거의 와해됐고, 누가 대통령 후보로 나와도 한나라당 후보를 이길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탈은 한 쪽 방향에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사회 개혁에 나서기는커녕 삼성 재벌과 손 맞잡는 모습에 절망해 이탈한 이들도 분명 많이 있었다. 그러나 주류 언론을 통해 더욱 부각된 것은 중산층의 이탈이었다. 전 세계가 부동산 호황인데 왜 "내 아파트 값"만 그만큼 오르지 않느냐는 불만에 휩싸인 상당수 중산층 역시 떠나갔다.

예상대로 2007년 대선에서 리버럴 세력은 참담한 결과와 마주해야만 했다. 한 번도 민주자유당 후속 세력에 맞서 대등한 경쟁자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던 리버럴 세력이 처음으로 압도적인 패배를 겪었다. 그리고 대다수 리버럴 정치인들은 이를 무엇보다 중산층 민심이 돌아선 결과로 해석했다. 김대중 정부 시기가 한국 리버럴 세력에게 김대중주의라는 유산을 남겼다면, 노무현 정부 경험은 이렇게 중산층 이반 트라우마라는 침전물을 남겼다.

두 유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더불어민주당

그러나 이 두 유산은 한동안 리버럴 세력의 겉모습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 시기가 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저 '잃어버린 9년' 동안, 리버럴 정당들은 집권기에 보인 모습과는 달리 사뭇 진보적인 입장을 표방했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에 맞서며 내놓았던 정책들을 거의 다 받아들였다.

이것은 리버럴 정당이 야당이 된 탓이기도 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 끊임없이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폭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가 벌어지자, 그때까지도 양대 선거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리버럴 세력은 전투적 야당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이명박 정부의 토건 광풍에 맞서 보편 복지 정책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자 북유럽 사회민주주의까지 들먹이며 더 왼쪽으로 나아갔다. 선거 때마다 리버럴 정당과 반-이명박/박근혜 연합을 결성한 진보정당들 역시 리버럴 세력이 급진화한 것처럼 보이는 데 일조했다.

2016-17년 촛불항쟁을 거쳐 조기 대선으로 다시 여당이 될 때까지도 리버럴 세력은 이런 다분히 예외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그래서 지금의 20대나 30대에게 더불어민주당은 '진보'정당이다. 단지 '리버럴'을 '진보'라 부르는 한국 주류 언론의 오도된 용어법 탓만은 아니다. 심지어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선명히 기억하는 40대조차 2010년대 초, 중반의 리버럴 세력을 주로 기억하면서 정부-여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9년만에 재집권한 뒤에 리버럴 세력이 보여주는 모습은 야당 시절에 잠시 뒤집어썼던 그 '진보'의 외양과는 거리가 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한국 리버럴 세력의 두 가지 역사적 유산이 다시 전면에 나와 정부-여당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촛불 정부'는 이번에도 게걸스럽게 사회운동의 상당 부분을 흡수했지만,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 요구 사이의 거리는 되레 더 벌려놓았다. 대신 남북미의 한반도 협상에 모든 것을 걸며 "평화가 민생"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남한 내에서 개혁의 지연으로 곪아가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남북미 협상 이벤트로 치환하는 모양새다. 결국은 김대중주의의 반복이다. 한국 리버럴 세력은 지난 몇 년간의 외도를 끝내고 김대중주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런 회귀를 부추기는 게 다름 아닌 중산층 이반 트라우마다. 2000년대 중반에 부동산 자산 형성과 입시-학벌 경쟁에 막 뛰어들었던 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를 거치며 어느덧 중산층 대열의 중심에 서게 됐다. 현 정부-여당은 정권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 여론 집단이 바로 이들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중산층의 이반을 가장 위험한 적신호라 여길수록 이들의 단기적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 있는 어떠한 개혁도 포기하거나 기피하지 않을 수 없다. 조국 법무부장관 가족은 정부-여당이 가장 중요시하는 이 계층의 한 전형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촛불항쟁 이후 처음 맞는 총선을 앞두고 가장 첨예한 쟁점으로 대두한 집권 리버럴 정당의 실상이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잃어버린 9년' 시기에 머릿속에 남은 리버럴 세력의 잔상을 차마 떨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것은 분명 김대중주의 패러다임과 중산층 이반 트라우마라는 과거의 두 유산을 대변할 뿐인 정치 세력이다.

더욱 분명해져야 할 "민주당 빼고"의 의미

이렇게 더불어민주당의 정체를 따지는 것은 결국 "민주당 빼고"('민주당만 빼고'는 아니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미해야 하는지 더욱 뚜렷이 하기 위해서다. 정말 민주당을 빼려면, 어떤 다른 세력을 선택해야 하는가? 민주당이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하는 세력을 키워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민주당을 뺀 뒤에 다른 이름의 또 다른 민주당을 불러들이고 말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약간의 분석은 우리에게 해답의 단초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현 정부-여당이 중산층 이반 트라우마 때문에 절대 해서는 안 될 일 취급을 하는 부동산 격차와 대학 서열 구조의 혁파에 앞장서는 정치 세력이 등장하고 성장해야 한다. 또한 박정희식 산업화의 결과에는 손대지 않은 채 평화/통일에서만 출구를 찾으려 하는 김대중주의 말고 다른 미래 전망이 한국 사회에 대두해야 한다. 이것이 제21대 총선에서 "민주당 빼고" 선택해야 할 대안의 기준이다.

기자 :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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