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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효과적인 언어, 시각 스피치-지구를 구하는 티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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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티셔츠에 단어 몇 개, 그림 몇 컷 그려 넣는다고 지구를 구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좋은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그게 디자인의 힘이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패션 프로젝트가 이어지는 이유다.

시티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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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알라가 그려진 흰색 티셔츠. 발렌시아가의 이 제품은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결연한 의지를 품고 있다. 지난해를 무섭게 달궜던 최악의 호주 산불, 그 재난을 향한 디자인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티셔츠에 그림을 그리거나 구호를 써서 판매하는 행위로 지구를 재난으로부터 구할 수 있겠냐고. 반짝 이벤트 아니냐고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반짝 이벤트인 것은 맞다. 하지만 대중의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 꼭 필요한 이벤트다. 아무리 끔찍한 재난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곧 묻히고 만다. 그게 사람 사는 일이다. 그래서 수시로 ‘잊지 말자’는 알람을 울려야 한다. 이를 위한 효과적인 언어가 바로 패션 디자인이다. 그래서 티셔츠로 외치는 것이다. 매일 입는 옷에, 그것도 심장 한가운데 메시지를 적어서 말이다. 단순하지만 화려한 시각 스피치. 장황한 연설 한 편을 듣는 것보다 SNS에 떠도는 코알라 티셔츠 한 컷의 각성 효과가 훨씬 더 강력할 테니까.

그래서 이런 식의 이슈 메이킹 디자인은 파워풀한 브랜드가 선두에 서야 한다. 얼마나 큰 금액을 기부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환기시키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발렌시아가가 깃발을 높인 이유가 여기 있다. 스트리트의 원탑이라면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베풀어선 안 된다(?)는 것. 사실 발렌시아가의 모기업인 케링 그룹(Kering S.A.)은 이미 100만 달러를 호주 사태 해결을 위해 기부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그래서 거칠 것 없는 이 브랜드가 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이슈 브랜드답게 가장 예민하고 강력한 디자인을 탑재하고 말이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호주의 산불은 잦아들 줄 모르는 붉은 폭풍으로 이어져 야생 동물들의 멸종 위기 소식으로 기억된다. 그 화마 속에서 발렌시아가는 ‘코알라’라는 세 글자를 택했다. 느리고 순진해 산 채로 죽어 갔고 앞으로 영영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멸종 위기의 동물. 그걸 직설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후드 티셔츠 92만 원, 반팔 티셔츠 54만 원. 가격은 발렌시아가답게 비쌌지만 주문이 이어졌다. 배송은 3월30일부터다. 3월이 다가오면 귀한 티셔츠를 입은 이들의 인증샷이 SNS를 달굴 것이다. 그로 인해 다시 코알라에 대한 관심이, 호주 산불 재해에 대한 관심이 이어질 것이다. 이슈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상식적인 다단계 작전이다.

이 브랜드의 사회 공헌 디자인 마케팅은 처음이 아니다. 2018년 세계식량계획(WFP)과 협업해 기아를 해결하자는 구호의 티셔츠를 발매한 적도 있다. 디자인? 브랜드 이름 옆에 WFP 로고를 턱 박은 것이 전부였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는 말했다. “발렌시아가의 브랜드 힘으로 알리고 지원하고 싶었다”고. ‘발렌시아가의 힘’으로 알리기, 그게 정답이다. 힘 있는 자가 목소리를 크게 높여야 효과적이다. 좋은 일은 널리 알려야 하고 빨리 알릴 수 있는 자가 더 크게 외쳐야 한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디자인이라면 더더욱.

[글 한희(문화평론가) 사진 발렌시아가, 노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17호 (20.02.2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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