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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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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취향] ‘200여년 간 촉촉’ 지름 3㎝ 청화백자에 담긴 옹주의 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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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9> 18세기 왕가 무덤 속 화장품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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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장자인 의소세손 의령원(懿 園)에서 출토된 부장품에는 화장 가루분을 뜰 수 있는 동제수적과 화장품 용기들이 포함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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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피장자를 위한 껴묻거리(부장품)에는 호화로운 물건이 사용됐다. 신라의 왕릉 천마총에선 금관을 비롯해 금귀고리와 목걸이, 금동신발 등 화려한 금속공예품과 함께 서역 만리에서 제작된 코발트빛 유리잔이 출토됐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황남대총의 유리병과 유리그릇들은 이집트 혹은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돼 북방 초원길을 통해 신라로 전해진 것이다. 황금의 나라 신라에서는 지방 세력에 금을 하사하기는 했지만 유리는 오로지 왕릉급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이는 유리가 그만큼 구하기 힘든 값비싼 교역품이자 귀중한 보물로 여겨졌음을 시사한다.

유리공예품에 견줄 만한 최고급 하이테크(high-tech) 제품은 도자기다. 도자기 선진국인 중국을 제외하고 많은 나라들이 고화도(高火度) 자기 개발에 매달렸지만 유럽에서는 1700년대가 돼서야 독일 마이센에서 그 첫발을 뗄 수 있었다. 자기는 토기보다 굽는 온도와 강도가 높은 탓에 태토의 정제와 유약 원료의 조성, 가마 구조와 크기, 번조 방식 등 고도로 숙련된 기술력이 필요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초기부터 일찍이 청자 제작에 성공해 조선 청화백자까지 유구한 도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도자기는 계층에 상관없이 오랜 기간 다양한 기능으로 무덤에 부장돼 왔다. 특히 18세기 중후반 일부 조선왕실 가족의 무덤에서 등장하는 지름 3㎝의 유독 아주 작은 도자기들은 명기(明器ㆍ장사 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그릇)와 크기가 비슷하지만 화장품 용기이다. 영조의 딸인 화유옹주(和柔翁主ㆍ1741~1777)와 화협옹주(和協翁主ㆍ1733~1752)를 비롯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장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ㆍ1750~1752), 정조의 장남으로 5살에 요절한 문효세자(文孝世子ㆍ1782~1786) 묘에서 발견된 화려한 장식의 한국ㆍ중국ㆍ일본산 자기가 그것이다. 특히 화협옹주 묘의 화장품 용기 안에는 생전 옹주의 화장품으로 추정되는 화장성분이 그대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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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소세손 묘에서 출토된 일본 아리타 제작 등나무무늬 합. 뾰족뾰족하게 뻗어 있는 잎들 아래로 짧은 등나무 꽃술을 묘사하고 주변에 덩굴줄기를 그려 넣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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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품이 피장자의 위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을 감안한다면 왕실 가족 무덤에 넣어진 이 용기들은 아마도 고대 유리공예품에 견줄 만한 최고급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장품 도자용기들은 어떤 경로로 조선에 들어와 왕실 전유물이 될 수 있었을까. 왕실 가족 무덤의 부장품 중 중국산 화장용기는 모두 청나라 도자기의 중심인 징더전(景德鎭) 민요(民窯)에서 제작된 것이다. 18세기 중후반은 건륭황제의 재위기간(1736~1795)으로 명사교장들이 징더전에 모여들어 자기의 완성도를 최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시기이다. 당시 청의 물건은 사절단의 연경사행과 관허(官許) 상인들의 무역으로 유입됐다. 북경을 다녀온 사신들의 연행록에는 중국의 도자와 골동 등에 대한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연경사행은 1637년부터 1894년까지 600여회에 걸쳐 이뤄졌으며, 사은사(謝恩使ㆍ조선 임금이 중국 황제에게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들이 여정 중에 청의 황제나 관리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면 답례품이나 선물의 형식을 통해 자기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사행은 5개월여에 이르는 긴 기간이었기 때문에 이 여정 동안 사절단은 주로 융복사(隆福寺), 유리창(琉璃廠)에 가서 자기를 비롯한 각종 고동이나 서화 등을 구매했다. 화유옹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화장품 용기와 옥제비녀, 은제 주전자, 휘녹색 벼루 등 다양한 청 공예품은 남편 황인점이 사행 노정 중에 하사 받았거나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사들인 징더전의 도자기들은 조선 왕실 가족의 사치품이자 청 문물을 향유하는 완상용 소품으로 귀하게 대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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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모란넝쿨무늬 호’에는 미안수로 추정되는 지하수가 담겨 있었다. 지금의 로션과 같은 기능인 미안수는 피부를 곱고 촉촉하게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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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무늬가 그려진 화장품 도자용기들은 일본 아리타(有田)의 백자이다. 규슈(九州) 히젠번(肥前藩)의 여느 작은 시골 마을과 다름없었던 아리타는 임진왜란 때 피랍된 조선의 도공 이삼평(李參平ㆍ?~1655)에 의해 최초로 자기가 생산된 후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유의 정교함과 고도의 채색 감각이 가미된 아리타 자기들은 훗날 독일의 마이센, 프랑스의 리모주와 같은 유럽 명품 도자기의 모태가 됐다. 등나무는 예부터 일본에 자생하는 덩굴식물로 보라색 꽃이 풍성하게 자라 관상용으로 적합하다.

등꽃은 일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인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문장으로 짧은 꽃대에 알알이 달려 있는 꽃의 형태가 쌀을 연상시켜 풍작의 의미로 통용되었다. 헤이안(平安)시대 후기 후지와라 가문이 번영한 후부터 품위와 격조를 상징하는 의장으로서 궁중과 귀족의 생활용품 곳곳을 장식하는 무늬로 자리매김했다. 등나무 무늬의 사용자와 등꽃의 길상적인 의미는 이 문양들이 18세기 중후반 조선왕실에 유행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특히 화협ㆍ화유옹주, 의소세손, 원빈홍씨 묘에서 발견된 색회자기들의 형태가 아리타에서는 매우 흔치 않은 형식으로 밝혀진 만큼 조선왕실에서 특별히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화장품 도자용기에는 소나무, 운룡문과 더불어 모란 국화 연꽃 철쭉 매화 등의 화훼무늬와 장수, 복을 바라는 길상문을 발견할 수 있다. 도자기의 문양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재인 화훼문은 화장이라는 상징성과 그 미감이 잘 들어맞았을 것이다.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모란넝쿨무늬 호’에는 뚜껑과 전면에 모란당초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모란은 ‘꽃 중의 왕’(花王)이라는 별칭답게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회화와 공예품의 단골 소재였다. 소량의 꿀찌꺼기를 담았던 작은 합에는 철쭉이나 국화넝쿨문 등이 장식됐으며 청화안료의 담묵으로 표현하는 도자문양만의 운치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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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홍씨 묘에서 출토된 은제수적은 왕실 공방에서 제작된 최고 수준의 공예품이다.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문양으로 장식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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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관영 도자기 제작소인 분원(分院)산 백자에는 주로 칠보문(七寶文)이 그려져 있다. 다복ㆍ다수ㆍ다남 등 도교적 이념에서 비롯된 칠보문은 길상문이 유행했던 조선 후기에 애호됐다. 원빈홍씨의 무덤에서는 화장분을 물에 적셔 사용할 수 있는 은제수적이 발견됐는데, 복을 바라는 의미로 ‘壽福康寧(수복강녕)’과 칠보, 여의두 문양을 함께 그려 그 의미를 더욱 극대화했다. 상식적으로 이 화장품용 자기들이 명기로 제작됐다면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문양을 장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등나무, 모란, 칠보문 등 당대 유행했던 다양한 종류의 길상문은 이 백자들이 실제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생활 기명이자 왕실의 취향이 반영된 감상용 소품이었음을 시사한다.

조선 후기 민간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오랜 전란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재앙을 면하고 평안과 복을 바라는 염원이 팽배했다. 길상문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미술품 전반에 등장한 길상문의 유행은 이러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실이라고 달랐을까. 길상무늬가 새겨진 화장품 도자용기들에는 왕실 가족들의 내세 평안을 기원하고 조선 왕실의 자손들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 왕실의 안녕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곽희원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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