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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사면을 위한 궤변 : 이명박의 '친인척'과 문재인의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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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1월 29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특별사면 명단이 발표됐습니다. 법무부가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 첫 장에는 사면의 원칙과 기준이 간략하게 정리돼 있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줄에는 "대통령의 주요 친인척, 재벌그룹 총수, 저축은행 비리 사범, 민간인 사찰 사건 관련자, 성폭력·살인·강도 등 반인륜 흉악범, 벌금·추징금 미납자, 별건 재판 진행 중인 자 등은 사면대상에서 제외하였음"이라고 배제 기준이 적혀 있었습니다.

● 이명박의 사면 원칙 "법적으로는 인척이 아니어서…"

그런데 명단을 읽다 보니 뜻밖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현준 당시 효성 부사장(現 효성그룹 회장)이 "형선고실효 특별사면 및 특별복권" 명단에 포함돼 있었던 것입니다. 조현준 부사장의 아버지는 조석래 現 효성그룹 명예회장으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는 사돈 관계였습니다. (조석래 명예회장의 조카가 이명박 대통령의 딸과 혼인) *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그때도 법조팀 소속이었던 저는 법무부 대변인에게 질문했습니다.

"보도자료 첫 장에 대통령 친인척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적혀 있는데 조현준 효성 부사장이 사면 대상에 포함됐네요. 사돈은 친인척이 아닌가요?"

법무부 대변인은 상당히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조현준 씨는 엄밀히 말하면 법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척은 아닙니다. 다만, 국민 정서를 고려해 보도자료에는 '주요 친인척'을 배제했다고 썼습니다. 법적인 인척은 아닙니다."

SBS

2013년 1월 이명박 정부 특별사면 보도자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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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준 부사장이 대통령의 사돈 집안사람이어서 마치 대통령의 친인척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자기의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혈족, 배우자의 혈족의 배우자'만 해당되는 민법상 인척은 아니기 때문에, 조 부사장을 사면한 것이 친인척 사면 배제 원칙을 위배한 것은 아니라는 해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겸연쩍은 듯 배제 대상인 친인척 앞에 "주요"라는 단어를 넣었다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 문재인의 사면 원칙 "부패범죄는 아니어서…"

이로부터 6년 하고도 11달이 지난 2019년 12월 30일, 문재인 정부 역시 특별사면을 발표했습니다. 이번 보도자료에는 9쪽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중대 부패범죄의 사면을 제한하는 대통령 공약에 따라 엄격한 사면 배제기준을 기존과 같이 유지하고, 부패범죄가 아닌 정치자금법위반사범 중 장기간 공무담임권 등의 권리가 제한되었던 소수의 정치인 이광재, 공성진 前 국회의원 2명 복권"

참여정부의 실세 정치인이었던 이광재 전 의원과 이명박 정부 당시 '친이계' 정치인으로 꼽혔던 공성진 전 국회의원은 "부패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면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브리핑에 나선 김오수 법무부 장관 직무대행은 이광재, 공성진 등을 사면한 것이 "과거 낡은 정치를 벗어나 새로운 정치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자화자찬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SBS

2019년 12월 문재인 정부 특별사면 보도자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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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이어 브리핑에 나선 이성윤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광재 씨는 부패한 스폰서에게 거액의 미국 달러를 받았고, 공성진 씨는 아내의 운전사 월급까지 기업인에게 받은 사실이 인정돼 유죄가 확정됐는데, 정부가 보기에는 이런 행위가 부패가 아니라는 의미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성윤 검찰국장은 "그분들은 장시간 자격제한을 받았고 같은 시기에 재판을 받던 분들이 사면을 받거나 자격제한 없는 것으로 알아 (이번에) 사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며 "(문재인 정부가 규정한) 5대 중대 부패범죄는 뇌물·알선수재·알선수뢰·횡령·배임입니다. (두 사람의 죄명은 정치자금법 위반이라서) 이 범위에 해당이 안 되는 걸로 압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광재·공성진 씨가 잘 나가는 정권 실세 시절에 기업가로부터 거액의 부정한 돈을 받았기 때문에 마치 "부패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범죄는 문재인 정부가 규정한 5대 부패범죄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광재·공성진 씨를 복권한 것이 5대 중대 부패범죄사범 사면 배제 원칙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해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청와대에서 브리핑에 나섰던 한 핵심 관계자는 '이광재 씨는 10만 달러 가까이 받았는데, 이런 건 청와대 기준으로 부패가 아니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광재 씨가 받은 돈이) 10만 달러라고요? 제가 알기로는 그 액수가 아닌데, 현저하게 적은데요?"라며 사면 기준을 정당화하려다가, 브리핑 종료 후 한참 뒤 자신이 금액을 잘못 파악했으며 미화 9만 5천 달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발언을 정정하는 촌극까지 빚었습니다.

● 이명박의 "친인척"과 문재인의 "부패"

엄밀히 말해서 이명박 정부의 사면 보도자료와 문재인 정부의 사면 보도자료에 틀린 말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조현준 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민법상 인척'이 아니며, 정권 실세가 기업인으로부터 (대가성이 입증되지는 않은) 부정한 돈을 받는 행위는 문재인 정부가 규정한 '5대 중대 부패범죄'인 뇌물, 알선수재, 알선수뢰, 횡령, 배임에 해당하지 않는 '정치자금법 위반'인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친인척은 사면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 말이 사실은 '민법상 인척'이 아닌 사돈 집안의 장손은 사면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이해했을 사람은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이 "5대 중대 부패범죄사범은 사면하지 않겠다"라고 발표했을 때, 그 말이 사실은 정치인이 대가성이 입증되지는 않은 부정한 돈을 받은 경우에는 사면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였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이건 "월 10만 원만 내면 데이터 무제한 사용"이라고 통신사가 광고를 하면서,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제공은 하겠지만 1GB를 쓰고 나면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져서 사용이 매우 불편해진다는 사실은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통신사는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고 주장하겠지만, 속지 않았다고 받아들일 소비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친인척"이나 문재인 정부의 "부패범죄사범"에 대한 사면 기준 적용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 2년 전에는 스스로 걸러냈던 '이광재 사면'

더구나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17년 12월 특별사면 때는 이광재 전 의원에 대해 이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설명이 더욱 군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사면 명단에는 이광재 전 의원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유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광재 전 의원의 죄명은) 5대 중대 부패 범죄의 범주는 아니지만, 돈과 관련된 정치자금법 위반이라 사면에서 배제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2년 전까지는 문재인 정부 스스로도 부정한 돈을 받은 정치인의 죄명이 자신들이 임의로 규정한 부패범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패범죄가 아니니 사면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공평하게 말하자면 2013년 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보다 2019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사면이 질적으로 더 나은 것은 사실입니다. 2013년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비리에 대해서는 사면하지 않겠다'라는 자신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면서 자신의 재임 중에 알선수재나 뇌물죄로 유죄가 확정된 천신일, 최시중 씨 등 측근들을 사면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번에 자신과 가까운 곽노현, 이광재 씨 등을 사면하긴 했지만, 2013년의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원칙을 대놓고 깨뜨리지는 않았습니다.

● 지록위마(指鹿爲馬)와 '사면을 위한 궤변'

하지만 '사돈은 민법상 인척이 아니니 사돈집안 사람은 사면하겠다'라는 말이나 '정치인이 스폰서에게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은 부정한 돈을 받은 것은 우리가 규정한 중대 부패범죄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면하겠다'라는 말에는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자신들이 규정한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정치인이 기업인에게 부정한 돈을 받는 행동은 "부패범죄가 아니"라고 보도자료에 명시한 대목에선 권세가 있는 사람이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우기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까지 떠오릅니다.

사면권은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권한입니다. 사면권 자체가 법치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적지 않지만, 헌법이 보장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대통령이 되기 전에 자신들이 내세웠던 원칙을 교묘하게 우회하려고 말장난 같은 궤변을 펼치는 것까지 용인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6년 전 이명박 정부가 측근을 사면하면서 스스로 내세운 원칙을 훼손한 일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있듯이, 문재인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사면을 위한 궤변'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임찬종 기자(cjy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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