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9 (일)

"기술은 곧 사람의 것"‥전자·화학 코리아 일군 주인공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시아경제

고(故)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시아경제 박소연 기자] 구자경.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수식어가 붙는다. '기술ㆍ인재 육성 전도사'.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이란 경영철학에 따라 1차ㆍ경공업 중심의 국내 산업 지도를 전자ㆍ화학 중심으로 바꿔 놓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14일 94세 일기로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LG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영인이란 평가를 받는다. 전자ㆍ화학 등 지금 우리 산업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첨단 산업의 열매는 구 명예회장이 경영자로 있던 시절에 씨앗을 뿌려 성장했다.


진주사범을 졸업한 고인은 부산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그룹의 모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1969년 구인회 창업회장의 별세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1970년 LG그룹 회장을 맡아 25년간 그룹을 이끌며 회사를 한국 기업 럭키금성에서 세계적인 기업 LG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시아경제

◆불모지 한국, 전자 화학산업 일군 역사의 장본인=구 명예회장은 국토가 작고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사람 만이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이 신념으로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어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이끄는 동안 LG그룹은 비약적 성장을 일궈내며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1970년 2대 회장으로 취임해 25년간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1150배 성장을 이뤄냈다. 이 기간 중 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늘었다.


구 회장 취임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 때 범한해상화재보험과 국제증권, 부산투자금융, 한국중공업 군포공장, 한국광업제련 등을 인수했고 럭키석유화학(1978년), 금성반도체(1979년), 금성일렉트론(1989년) 등을 설립하는 등 외형도 불렸다.


특히 훗날 LG그룹의 문화와 뿌리, 미래가치를 이루게 될 인재육성과 기업혁신을 강조하면서 그 누구보다 연구개발(R&D)에 힘을 쏟았다.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공장과 여천공장이 가동을 시작하기 전에 구 명예회장의 지시에 따라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연구실이 각 공장마다 소규모로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76년 국내 민간기업 중에서는 최초로 금성사에 중앙연구소를 만들었다. 전사 차원에서 설립한 이 연구소에 첨단 장비, 국내외 우수 연구진 등의 파격적인 투자를 집행했다.


구 명예회장 재임 기간 설립된 연구소는 70여개에 이른다. "연구소를 잘 지어야 우수한 과학자가 온다"고 당부하며 우수 인재를 끌어들이는 연구 프로젝트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의 노력으로 LG그룹은 모태인 화학과 전자뿐 아니라 정보기술(IT), 부품ㆍ소재 등 다양한 영역으로까지 발을 넓힐 수 있었다.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등 대표 제품들이 구 명예회장 재임 때 개발됐다.


1975년 구미공단에 컬러TV를 연간 50만대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설립한 데 이어 1976년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1980년대에는 미래 첨단기술 시대를 내다보고 컴퓨터와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만들었다.

아시아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몸소 실천하는 LG 기틀 마련= 구 명예회장은 LG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성과 외에도 재계에서 굵직한 발자취들을 남겨 귀감이 됐다. 고인은 재계에서는 처음으로 25년간 맡았던 회장직을 스스로 후진에게 물려줘 국내 기업사에 '무고(無故, 아무런 사고나 이유가 없음) 승계' 사례를 남겼다.


아울러 시대의 흐름에 맞춰 57년간 이어진 구씨와 허씨 양가의 동업관계도 전혀 잡음없이 마무리했다. 불협화음 하나없이 일궈온 구씨와 허씨 양가의 동업관계는 재계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LG와 GS그룹의 계열분리 과정도 합리적이고 순조롭게 진행돼 재계의 '아름다운 이별'로 언급된다. 이처럼 순탄하게 계열 분리가 이뤄진 배경에는 "한 번 시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고(故) 구인회 창업회장의 뜻을 받들어 구 명예회장이 '인화(人和)의 경영'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재계 관계자는 "고인은 또한 선친의 뜻을 받들어 인화, 인재,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한 분"이라며 "당시엔 기술력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기술을 중시했지만, 고인은 '기술은 곧 사람의 것'이라며 모든 분야에서 사람을 최우선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구 명예회장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지고 발인은 17일 오전이다. 고인은 화장 후 안치될 예정이며 장지는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