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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연합시론] 또 확인된 '일본군의 위안부 관여'…아베 역사관 바뀌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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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에 관여한 사실(史實)을 뒷받침하는 일본 공문서가 추가로 확인됐다. 지난 주말 일본 매체인 교도통신이 보도한 내용이고, 문건은 일본에서 생산된 것이니 '팩트 체크'는 불필요하다. 통신은 1938년 작성된 주칭다오(靑島) 일본 총영사의 보고서 내용을 인용, 중국 현지에 진격한 일본군이 병사 70명당 위안부 1명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의견을 본토 외무성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른바 역사 수정주의에 근거해 위안부의 강제모집, 송출 등 관(官)의 개입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해 온 아베 신조 총리의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역사적 '증거'가 하나 더 보태진 셈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조사의 일환으로 내각관방이 2017∼2018년에 새로 수집한 23건의 문서 중 13건에서 발견된 내용이라니 문건의 신빙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지만, 일본 정부는 사반세기 전인 1993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의 개입을 인정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를 통해서다. 그냥 정치적 시늉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광범위한 역사적 조사를 진행한 토대 위에서 이뤄진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내외에 큰 울림이 있었다. 물론 자민당 55년 체제가 뿌리째 흔들리던 가운데 나온 담화여서 일본 내 보수 본류의 진정성 있는 진단과 사과였느냐는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전후 역사반성의 견지에서 볼 때 전례 없이 유의미한 담화였음은 분명했다. 한일관계가 냉각된 현시점에서 담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욱더 그렇다. 담화는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설치·운영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고 명백하게 서술했다. 또한 위안부의 모집도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고, 그 과정에서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했다.

이랬던 일본에서 2001년에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매년 참배, 황국사관에 기초한 우익교과서의 요란한 등장 등을 거치면서 '고노 담화'의 정신은 급속히 훼손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아베 정부에 이르러서는 '고노 담화' 자체를 부정하는 표변을 서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체결됐던 양국 간 '위안부 합의'는 사실상 파기된 상태이고, 일제 강제징용 판결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 갈등은 여전히 출구를 못 찾고 있다. 이런 일련의 관계악화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고, 해석하는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관에서 비롯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학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후손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역사를 가르치자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는 이웃 나라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의 생채기를 또다시 헤집는 일과 다름없다. 일본은 사과는 할 만큼 했다며 기회 있을 때마다 돈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여왔다. 반면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인정과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한다. 사과는 피해자가 됐다고 해야 멈추는 것이지, 가해자가 스스로 판단해 충분하다고 손을 털 일은 아니다. 이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고작 20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 슬픈 카운트다운이 종료되기 전에 하루빨리 일본 정부는 역사에 부끄럼 없는 반성과 사과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인류 보편의 인권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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