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5일 오전 부산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태국 양자회담에 참석해 회담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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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try me(우리를 시험해 보라)’란 말을 일본에 하고 싶다.”
“사실이 아니면 소설일 뿐이다.”
시험해보라는 건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말이고, 일본 언론의 보도를 소설이라며 비판한 건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비서’인 두 사람이 실명으로 다른 나라를 맹비난한 것은 이례적이다. 전문가나 알 만한 사람들은 “문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실상 문 대통령의 메시지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들에게 지시할 수 있는 이는 문 대통령밖에 없다.
한·일 갈등을 유례없는 수준으로 고조시킨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이 일단 봉합됐다지만, 여진의 진폭이 크다. “브리핑 내용이 달랐던 것에 대해 일본이 사과해왔다”는 정의용 실장의 전날 발언을 놓고 25일 “그런 사실이 없다”(일본 요미우리 신문 보도)→“일본에 항의했고 일본 측은 사과했다”(윤도한 수석)→“정부로서 사죄한 사실은 없다”(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며 다른 입장을 이어갔다.
이는 그러나 양국 정상 간의 불신이 낳은 증상일 뿐이다. 이번 지소미아 국면을 지나면서 이미 골이 팰 대로 패인 두 정상 간의 갈등이 깊어졌고, 신뢰 회복은 더 멀어졌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는 상극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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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출발부터 다른데, 불만은 쌓이고
문재인 정부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진보 정부다. 지난 8·15 때 경축사를 통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주창한 장면이 상징적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와 한국의 지소미아 카드가 맞붙으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점이지만, 문 대통령은 일본을 직접 비판하는 대신 남북 간이 협력을 상징하는 ‘평화경제’를 극일(克日)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아베는 극우에 가깝다는 게 우리 쪽의 시선이다. A급 전범이었다가 사면된 뒤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외손자인 그는 외조부보다 더 우측에 기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쟁 불가 등을 규정하고 있는 평화헌법 9조를 바꾸는 게 정치 필생의 과업이다.
출발부터 다른 두 정상의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증했다. 청와대는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부터 일본이 한·미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는 불만이 크다. 또 “일본이 뜻대로 안 되자 동북아의 판을 다시 짜려 수출 제한 조치를 꺼내 들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아베는 박근혜 정부 때의 위안부 문제를 문 대통령이 원점으로 되돌린 데 대한 반감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역사관이 다른 데다 일본은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리해서 관리한다’는 기본적인 전략관으로, 문재인 정부의 평화 공존 정책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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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국내 정치적 수요까지 겹쳐
외교라는 게 애초 국내 정치의 연장선이자 때론 종속변수라고 하지만, 한·일 관계는 이전부터 그런 측면이 더 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말 독도 방문에 그 예다. 지지율이 반등했다. 지소미아의 경우만 해도 동아시아연구원이 이달 초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60.3%로 반대(18.9%)의 세 배 이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일본에 저자세를 보였다간 곧 있을 총선에서 타격이 불가피하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을 잠시나마 활황으로 이끌었다는 '아베노믹스'가 주춤하는 상황에서 최근엔 정부 주최 벚꽃놀이 행사를 통해 지역구를 관리했다는 이른바 '벚꽃 사유화 논란'이 번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이날 발표한 아베 내각 지지율은 50%로, 지난달보다 7%포인트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 한국 강경 노선을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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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우리가 옳아도 감정적 대응까지 옳을까
지소미아 타결 이후 이어진 국면에서 일본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자유한국당 소속인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수출규제 재검토를 쏙 뺀 채 국장급 회담 재개만을 밝힌 이번 일본의 지소미아 유예 관련 발표는 외교상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대응 방식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적잖다. 감정적인 메시지가 문제 해결에는 득보다 실이 될 거란 측면에서다. 미국과 일본에 밝은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의 말이다.
“‘You try me’ 같은 말은 적성국을 향해서도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가 격앙돼 있다고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은 국내를 향한 메시지로는 유효할지 몰라도,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돼 협상의 한계를 지운 것과 마찬가지다. 이럴 때일수록 ‘할 말이 많지만, 참겠다’는 식의 대응이 효과적일 수 있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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