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진 작가와 김태한 출판기획자가 서울 서초구 내 책과강연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나누는 모습/책과강연 |
"20대 내내 앓아왔던 멀미나는 체기·복통은 30대가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약이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절이나 교회를 가보기도 했다. 신이 나를 구원해 주지 않았기에 사람에게 매달려보기도 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어쩌면 나는 '40대의 나'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태운 버스는 점점 빨라졌고 토할 것 같은 멀미도 심해져만 갔다."
서울 서초동 인근 '책과강연' 연구실에서 만난 송수진(여·35) 작가는 "이 사회의 철저한 을(乙)로 살아왔다"며 저서 '을의 철학'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운을 뗐다. 송 작가는 그러면서 "펜을 잡고 글을 써내려가게 한 원동력은 '힘내라는 위로보다 좋은 사람이 되라'는 다수의 자기계발서가 아닌 '철학책'"이라고 했다.
과거 20대의 송 작가는 식품회사(갑) 판매원(을)으로, 점주(병)에게 밀어내기를 강권하며 지옥 같은 비정규직 삶을 살았다. 뾰족한 재주 없이 고만고만한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비정규직 삶을 전전하던 20대의 송 작가. 그런 송 작가는 우연히 동네도서관에서 철학가 '칼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을 접했고, 본인이 '왜 이 시대 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회상하게 됐다. 동시에 '영원할 것 같던 멀미가 멎은 느낌'도 찾아왔다. 이는 그가 펜을 쥐고 책을 쓰게 된 이유가 됐고, 글을 써야 하는 동기부여가 됐다. 철학은 어떻게 송 작가를 새로운 삶으로 이끈 것일까. 다음은 일문일답.
- 책 제목이지만, '을(乙)의 철학'이란 텍스트가 주는 메시지가 매우 직관적이고 경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을 '을'로서 자각한 순간이 있는가.
"우유 판촉을 하는 인턴사원 때 일이다. 이 일은 말 그대로 우유를 배달시켜 먹을 고객을 찾아다니며 계약을 유도하는 것이다. 당시는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날 나는 이마트에서 대기 중이었다. 평소에는 아파트 입구 쪽이나 신호등 앞에서 가판을 깔고 고객을 유치하지만 그날은 체감온도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가 찾아와 버텨낼 수 없었다. 그렇다. 이마트 입구에서 고객들과 접하려 한 것은 잠시라도 몸을 녹이기 위해서였다. 강추위와 씨름을 하던 그날 저녁 문자가 1통 왔다. '연말이라 유동인구가 많으니 실적 없이 집에 갈 생각하지 말라'는 팀장의 문자였다. 문자를 받고 나니 허탈한 마음과 함께 심한 멀미가 나는 것처럼 매스껍고 헛구역질과 함께 역한 신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잠시 후, 몸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특히 입이 덜덜덜 거려서 치아 부딪치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손도 떨리고 다리도 떨리고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되서야 내가 그랬던 이유를 칼 마르크스에서 찾았다."
- 칼 마르크스 등 철학을 통해 본인을 자각했단 것인데, 그럼 철학과 관련해 본인의 생각을 글로 옮겨 놓으려 한 배경은 어떻게 되나.
"늘 감정을 감추고 숨긴 채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자기증명과 표출의 욕구도 일었다. 감정배설의 욕망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철학자 사르트르도 이야기 했듯이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 같지만 결국은 타인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저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철학공부라는 것을 하면서 인식의 변화를 마주치는 그 과정을 쓰고 싶었다."
- 철학을 공부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내 삶에서 이해가 안 되는 지점들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다. 살다보면 자신을 아프게 하는 그 무엇들이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한번 뿐인 내 삶을 어색하게 만드는 그 무엇들 말이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내 시간과 내 노동력도 상품이 되어 팔려야 하는데 당연히 노동소외, 실존소외들을 경험 할 수밖에 없다.
즉, 당연하다고 생각된 것들 속에서 은폐되어 있는 진실도 알고 싶었고,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지점에서 철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었다. 이렇게 나를 둘러싼 흐름이나 법칙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자신의 삶이나 생을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찾고 싶어서 철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계속 찾아가는 중이다."
- 그렇다면 철학은 우리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가.
"아무리 과학과 신기술 지식이 발달해도 인간은 여전히 회의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지점들이 있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완벽해보여도 여전히 가슴 한편에는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고, 삶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철학은 이런 지점들을 계속 건드린다. 사람을 잠시 판단중지하게 하는 질문들을 던진다. 그 질문에 잠시 그동안의 선입견에 의한 판단을 유보하고 자신에게 지금 주어진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게 해준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걸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만일 지금 소나기를 피하지 못해 빗속에 있다면 그 속에서 주저앉지 마시고 기어서라도 햇빛을 찾아가셨으면 한다. 타인은 지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적이 되기도 하니까. 요즘 들어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이야기한 '인간은 최소폭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발언이 자꾸 맴돈다. 그는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타인에게 항상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언어로, 시선으로, 선입견으로 혹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아닌지 계속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 향후 작가의 계획이 있다면.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이제는 흘러가는 대로 살려고 한다. 다만, 살면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다. 현재 청소년 상담일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이 일에 집중을 하고 싶다."
송수진 작가는...
1985년생. 인천대학교 행정학과 학사-명지대학교 대학원 철학상담치료학과 재학
2019. 3. 저서 '을의 철학' 출간(대한출판문화협회, 2019 올해 청소년 우수교양도서 선정)
우승준 기자 dn1114@metr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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