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국립중앙박물관이 넘겨 받아
2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항복 종가 유물 기증 기념식이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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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재상 이항복의 초상화와 천자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일 조선시대 명재상 오성부원군 이항복 (1556~1618)의 15대 종손 이근형(47, 사업가) 선생으로부터 400년 넘게 종가에서 간직한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와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 ‘이항복필 천자문’ 등 17점을 기증받았다.
이번에 기증된 경주 이씨 백사공파 종가 전래품은 이항복이 공신으로 임명될 때 받은 문서인 '호성공신 교서와 초상화', 이항복이 손자를 위해 직접 쓴 ‘천자문’과 친필 자료 등 이항복 관련 유물 6점, 증손 이세필(1642~1718) 초상화 1점 및 다른 후손의 교지 등 문서류 5점, 초상화 함 및 보자기 5점이다. 이 중 ‘호성공신 교서’는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 교서로 보물급 문화재이고, 공신 초상화와 함께 조선 17세기 공신 제도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천자문’은 손으로 쓴 천자문 중에서 가장 시기가 이른 천자문으로 가치가 높다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설명했다.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 민간설화의 영향으로 한음 이덕형(1561~1613)과 관련된 일화가 알려져 있다. 이항복은 실무능력이 탁월한 관료학자로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진정한 재상으로 학계에서 평가 받고 있다.
이항복은 25세인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급제 후 39년 동안 관직 생활을 했다. 9급 관리에서 20년 만에 최고 관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는 37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3품 도승지(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로 선조(재위 1567~1608)를 의주까지 모시면서 시의적절한 판단으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기도 했다. 이항복은 정유재란까지 5차례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안으로는 국방을 책임지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을 전담하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전란이 수습된 1599년(선조 32)에는 정1품 공신에게 주어지는 작호를 받아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49세인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신 공으로 정곤수(1538~1602)와 함께 호성공신 1등에 임명돼 ‘호성공신 교서’를 받았다. 교서란 국왕이 공신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로 공신호, 공적, 특권(공신 초상화, 품계, 토지·노비·은자)과 공신 명단이 적혀 있다. 이 ‘호성공신 교서’에 이항복의 공적이 기록돼 있다.
공신에게 주는 혜택으로 나라에서 하사하는 공신 초상화는 가문의 영광으로 후손들이 귀하게 보존했다. 초상화가 낡으면, 베껴 그려서 후모본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계승했다. 이번에 기증된 이항복 초상화 2점 모두 1604년 호성공신 초상과 1613년 위성공신 초상을 18세기에 모사해 보존한 것이다. 두 초상화에는 원본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지만, 얼굴이나 복식에 명암을 표현하는 등 18세기 초상화의 특징이 반영돼 있다. ‘위성공신상 후모본’은 서울대박물관 소장 ‘이항복 초상화 초본’과 얼굴 표현이 유사해, 이 초상화 초본이 이항복 58세 때인 1613년 위성공신이 됐을 때 그려진 초상화의 초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집안 간 인연으로 이번 기증이 성사되는데 기여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두 초상화 모두 후모본이나 이항복의 국란을 극복한 기개와 영웅적 면모가 잘 표현된 수작”이라고 평했다.
이항복이 자손 교육을 위해 손수 쓴 ‘천자문’과 ‘백사선생수서제병진적첩’에서는 이항복 친필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천자문’은 이항복이 52세인 1607년(선조 40) 여섯 살 손자인 이시중(1602~1657, 이항복의 장남인 성남의 장자)에게 손수 써 준 것이다.
‘천자문’은 굵고 단정한 해서체로 정성을 들여 썼다. ‘백사선생수서제병진적첩’은 이항복이 유교 경전 ‘예기’ 중 제사와 관련된 ‘제의’·’제통’·’예기’편을 써 병풍으로 만든 것을 200여 년 뒤 9대손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유원(1814~1888)이 첩으로 만든 것이다. 이항복은 이론적인 탐구보다는 실천을 중시한 인물로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절차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깨우치기 바라는 마음에서 직접 글을 써서 병풍으로 제작했다. 당시 유행한 조선화된 송설체를 토대로 근골을 살려 쓰는 이항복 서체의 특징이 드러나 있다.
이항복 종가 전래품은 한국전쟁 때는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피난가면서 모시고 다녔다. 평소에는 정기적으로 초상화나 글씨를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포쇄를 하며 보관에 힘썼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은 “오늘날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오성부원군과 같은 명재상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처럼 귀한 큰 선물에 보답하고자 잘 연구하고 전시해 많은 관람객들에게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항복 종가 기증 기념 전시를 내년 3월부터 7월까지 상설전시실 서화관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14대 종부 조병희 여사(74)는 “백사 할아버지 초상화를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다. 박물관에서 널리 알려주시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종가를 대표해 기증한 종손 이근형씨도 “백사 할아버지 유품이 국가 기관에 보존돼 다음 세대에도 잘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한선 기자 griffin@ajunews.com
이한선 griffin@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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