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학년도 입시가 마무리되어가던 겨울이었을 것이다. 각 대학의 논술고사가 지나치게 어려워 출제의도조차 파악하기 힘들다는 지적들이 있는 가운데 서울대 논술고사와 관련해 출제의도와 다른 답안도 정답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당시 채점을 한 국문과 조교들이 이런 주장을 했고 신문 사회면을 며칠간 달군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는 당시 부산지검에서 초임검사로 재직했다. 당시는 검사들이 항상 같이 점심을 먹었는데 점심을 먹으면서 그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검사생활 10년이 훌쩍 넘은 부장검사를 포함한 대부분 검사가 대학 논술시험이 너무 어렵다고 한마디씩 했다. 자기들이 다시 시험을 본다고 해도 아마 합격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또한 출제의도와 다른 것까지 정답으로 처리하면 곤란하다는 말과 함께. 필자는 막내라서 한마디도 못했지만 한마디로 당시 선배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소리들인가. 도대체 시험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왜 논술시험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아가 모든 것에서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이러한 태도가 과연 올바른가.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첫째, 논술시험에 정답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시험에 기본적인 정답은 있어야 하겠지만 논술시험은 다양한 시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설령 기본적인 골격은 필요하다고 해도 구체적인 내용까지 어떻게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참고로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 바칼로레아의 논술문제는 주로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데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은 가능한가” “꿈은 필요한가” “열정 없는 사랑은 가능한가” “편견 없는 정의는 가능한가” 등이 문제란다. 이러한 질문에 정답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왜 국문과 조교들이 채점한다는 말인가. 논술은 국어문법이나 작문 실력을 평가하는 측면이 있지만 굳이 국문과 조교들이 해야 할까. 법대에 진학하려는 학생과 음대, 자연대에 진학하려는 학생을 같은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까. 음대에 진학하려는 학생을 논리정연하고 판에 박힌 듯한 사고를 전개하는지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반대로 법대나 자연대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논리를 도외시한 자유분방한 사고를 한다면 선발하는 것이 타당할까. 다행히 요즘은 각 과 조교가 채점한다고 한다.
셋째, 논술을 치르는 학생들이 입학하고자 하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아가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실무를 몇 년씩이나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미 졸업한 대학의 입학 논술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사람들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채점을 잘못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시험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너무나 답답했다. 시험, 특히 대학입학시험은 그 대학에서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을 뽑는 것이다. 완벽한 답을 이미 아는 사람을 뽑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배워야 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질 내지 사고의 방식을 봐야지 완성된 정답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항상 정답을 요구하는 사회는 발전이 없을 것이다. 다양한 관점의 답들 속에서, 시행착오 속에서 혁신이 생기고 발전의 단초들도 발견될 것이다. 제발 모든 것에는 정답이 있다는 사고를 탈피하자.
김영문 관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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