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환 국제부장
지난 7월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달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워싱턴 정가와 언론의 지속적인 개입 요구에도 철저히 무개입 입장을 유지해왔다. 그러던 미국의 대응이 확 바뀐 것은 8월22일 우리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공식 발표하면서다. "미국 정부도 이해했다"는 우리 정부 측의 설명과 달리 미국 측은 압박 강도를 높이면서 협정 종료 결정 철회를 종용하고 있다. GSOMIA 종료 결정에 대해 미 국방부와 국무부가 '강한 우려와 실망감(strong concern and disappointment)'을 보이고 군 수뇌부가 직접 한국을 찾아와 압박 강도를 높이는 배경은 무엇일까.
격앙된 미 행정부 반응의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 6년 전에 있었다.
2013년 12월2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재집권 1년을 맞아 전격적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1기 아베 내각 당시 한 번도 참배하지 않은 것이 '통한의 극한'이라며 재임 중 반드시 참배하겠다던 평소의 다짐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당시 조 바이든 미 부통령까지 나서 "자제하라"고 경고했지만 그는 결국 현직 총리 자격으로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주일 미 대사관은 곧바로 그의 행동에 "실망했다"는 논평을 냈다. 곧이어 국무부까지 나서 강도 높게 신사 참배를 비난했다. 외교적으로 좀처럼 쓰이지 않는 '실망(disappointment)'이라는 단어가 잇따라 사용된 것이다.
미국의 대응은 논평에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 측에 2차 세계대전에서 강제로 동원한 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하도록 압박하고 나섰다.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 다음 날 예정됐던 양국 국방장관 전화 회담도 특별한 사유 없이 연기했다. 미 하원까지 나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나설 것을 촉구했다. 아베 총리가 미국의 골칫거리라는 미 언론의 원색적인 비난도 잇따랐다.
미국이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에 이처럼 강경하게 대응한 것은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신사가 어떤 곳인가. 태평양전쟁 당시 16만명의 미국인을 희생시킨 전범들을 기리는 곳이다.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는 승전국 미국이 규정한 전범을 부정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그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GSOMIA 종료 역시 결은 다르지만 아베 총리의 신사 참배와 비슷한 맥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다. 이는 GSOMIA가 실질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안보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느냐는 논란과는 다른 문제다. 협정 종료가 한일 당사자 간의 일이 아니라 미국의 동북아시아 안보 동맹 체계의 근간을 위협하는 문제, 즉 한국의 동맹 이탈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2016년 당시 한일 간 협정 체결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도 미국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미 행정부가 우리 정부에 느끼는 '실망'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 걱정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예정대로 GSOMIA를 종료한 이후의 상황이다. 그나마 "실망했다" 정도의 성명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6년 전 아베 총리가 겪은 것 이상의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GSOMIA가 종료되는 오는 23일 0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이틀 남짓이다. 최선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의 선택이라도 해야 할 때다. 지금이라도 귀를 열어 외교ㆍ안보 라인의 가감 없는 의견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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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환 기자 dhjung6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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