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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한국 최초 퀴어영화는? 여성 사랑한 여성의 광기어린 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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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폐막 제9회 서울프라이드영화제

한국퀴어영화사 조명한 첫 자료집 발간

한국영화 100년사 속 최초 퀴어영화는…

"내 영화 퀴어 아니다" 거부한 감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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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 주인공이 등장한 최초의 한국영화 '질투'(1960).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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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퀴어영화는 서구와 결이 다릅니다. 동아시아 퀴어영화에 가장 많은 공통점이 유부남 게이 캐릭터예요. 서구에선 잘 다뤄지지 않는 유부남 게이 서사가 일본‧중국‧한국 할 것 없이 풍성하게 만들어져 현실반영적인 모습으로 공감대를 형성했죠. 유교적 문화에서 가부장 가치를 남성이 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동성애자로서 삶도 향유하려는 도착적인 시도였던 것이죠.” 올해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집행위원장 김조광수)가 발간한 『한국퀴어영화사』 필진이자 ‘지석영화연구소’ 연구원 김경태 박사의 분석이다.



한국퀴어영화사 담은 첫 자료집



지난 13일 폐막한 제9회 서울프라이드영화제가 그간 논의가 미비했던 한국퀴어영화 역사를 정리하고 재조명한 자료집 『한국퀴어영화사』를 펴냈다.

‘퀴어(Queer)’란 성소수자를 일컫는 포괄적인 단어. 책임편집을 맡은 이동윤 영화 평론가는 9일 서울 CGV명동역에서 열린 출판기념 포럼에서 이를 “한국영화 속에 분명히 있었던 퀴어를 정리한 첫 책이자 역사적 사건”이라며 “퀴어 개념은 현재 구성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퀴어영화를 규정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번 책에선 확정하고 단언하기보다 질문을 던지고 다음 논의의 씨앗을 뿌리는 글을 쓰려 했다”고 밝혔다. 이 책에는 그를 비롯해 얼 잭슨 대만아시아대학 석좌교수 등 국내외 10인의 영화 필진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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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한국을 오가며 한국영화의 해외 소개에 앞장서온 영국 영화 평론가 토니 레인즈도 9일 『한국퀴어영화사』 출간기념 행사 축사에 나서 "책에 실린 퀴어영화 중 몇 편은 내가 영어 자막을 번역했다"고 돌이키며 "영어판 책도 나오길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사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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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퀴어영화는 '질투'



이번 책에선 한국퀴어영화의 출발점에 대한 논의도 소개됐다. 이는 ‘퀴어영화’를 정의하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올해 한국영화 100주년은 ‘조선인 자본으로 조선인 배우가 모여 만든 최초의 영화’인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개봉한 1919년 10월 27일을 기준으로 했다.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퀴어영화는 어떤 작품으로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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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가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발간한 『한국퀴어영화사』. [사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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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성소수자인 영화로, 책에 언급된 가장 빠른 작품은 ‘명일의 여성’이다. 1931년 4월 석간 ‘조선일보’엔 당시 떠들썩했던 동성애로 인한 여학생 동반 자살을 모델로 감독 겸 배우 홍개명이 이 영화를 연출할 예정이란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후 실제 제작됐다는 근거나 자료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자료집이 퀴어영화로 재조명한 130여 편의 한국영화 목록 중 첫머리엔 한형모 감독의 ‘질투’(1960)가 올랐다.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동성애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화”(황미요조 여성주의 영화 연구자)란 설명이다. 남성을 증오하는 여성 주인공이 이성애자인 여성 의동생에 집착하게 되는 광기어린 멜로다. 현재 필름 없이 시나리오만 남아있다.



'최초 레즈비언 영화' 엇갈린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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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이 남아있는 영화 중 동성애 커플이 주인공인 최초의 영화 '금욕'.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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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이 남아있는 작품 중 동성애 커플이 주인공인 최초의 영화로는 김수형 감독의 ‘금욕’(1976)이 꼽힌다. 가학증적 남편에 의해 학대받던 중년의 화가 노미애와 19세에 세 남성에 윤간을 당한 젊은 패션모델 김영희가 서로의 상처를 통해 가까워지지만 결국 파국에 이르는 줄거리다.

김경태 박사에 따르면 이 영화는 1998년 창간된 최초의 동성애 잡지 ‘버디’에 의해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로 발굴됐다. 김 박사는 “‘버디’의 편집진은 이 영화의 레즈비언다움을, 미애가 영희를 붙잡으면서 그 이유를 ‘그건 내 삶을 전부 너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찾는다”면서 “퀴어영화 여부를 판가름하는 궁극적 기준이 성애적 차원이나 성정체성의 고민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가치 중심을 동성에게 두는 사람, 즉 동성과 자신의 삶을 공유하는 이가 채운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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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한국영화 최초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제3의 성 '인터섹스'를 다룬 영화 '사방지'(1988). 사진 앞쪽이 주인공 사방지로, 여성의 외모에 남성의 성기를 타고난 인물로 묘사된다. 이번 자료집에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사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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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황미요조 영화 연구자는 이 영화에 대해 “‘금욕’은 퀴어영화의 범주로서 보다 동성애를 병리적인 현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동성애 혐오적”이라며 “식민시기 조선에서부터 미디어에서 여성

동성애는 성적으로 자극적인 구경거리와 가십의 대상으로 다뤄져 왔다”고 비판했다.



이 영화, 남성 동성애 등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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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남궁원과 하길종이 주연한 '화분'(1972). 주인공 현마(남궁원)와 비서 단주(하명중)의 동성애가 등장하지만, 본처뿐 아니라 첩까지 둔 봉건적 가부장 현마의 마초성이 더욱 부각된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이는 남성 동성애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황 영화 연구자는 “영화의 중심 소재나 갈등은 아니지만, 남성 동성애가 표현되거나 암시되는 영화로 김수용 감독의 ‘시발점’(1965), 신상옥 감독의 ‘내시’(1968), 하길종 감독의 ‘화분’(1972)이 거론돼 왔다”면서 그러나 “이 영화들의 남성 동성애적 관계나 행위들은 남성 인물의 권력 행사 혹은 권력의 상실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책의 여러 필진이 주목한 영화는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6)이다. 개봉한 지 8년이 지난 2014년 미국 샌디에이고 아시안 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작품이다. 한국전쟁 후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네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정민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와중에 게이바에서 만난 중년의 유부남 승걸과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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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호 감독의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에서 불륜 관계인 승걸(왼쪽)과 정민.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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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 박사는 이 영화를 궁극적인 의미의 “한국 최초 게이 영화”로 부른다면 그 근거는 “게이로 정체화한 주인공과 더불어 종로를 배경으로 한 성소수자 공동체 및 하위문화를 처음으로 재현했기 때문”이라며 “평범한 연인들 사이에서 흐르는 다정함”이 감지된다고 들었다.



'내일로 흐르는 강' 의미 있는 이유



김 박사는 이로써 이 영화를 “이성애적 관계를 섭렵한 마초적인 가부장만이 동성애마저(!) 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화분’(1972)이나, “그들(게이)을 처단함으로써 주인공 남성들은 자신의 건전한 이성애 남성성을 (재)획득”하는 존재로 게이가 묘사되는 김기덕 감독의 ‘악어’(1996), 김호선 감독의 ‘아담이 눈뜰 때’(1993) 등과 구분하며 “‘내일로 흐르는 강’은 이런 시행착오 끝에 등장한다”고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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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공포영화로서 여고생 동성애를 다뤄 주목받은 영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 김태용 감독, 민규동 감독이 공동 연출한 장편 데뷔작이다. [사진 씨네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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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의 제작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도 한국퀴어영화가 처한 현실을 시사한다. 9일 포럼에서 이동윤 평론가는 “대부분의 많은 퀴어영화의 시놉시스에서 퀴어성이 지워지거나 왜곡됐고, ‘퀴어’란 게 반전으로 등장해 ‘결국 그는…?’ 같은 말줄임표에 감춰져 있었다”면서 또 “퀴어영화지만 퀴어 혐오적인 시선의 작품도 다수 있어 이를 퀴어영화로 소개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 퀴어 혐오적‧비판적인 작품도 끌어안아 논의하기로 했다. 앞으로 이 책이 한국퀴어영화(담론)에 중심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고 기대했다.



퀴어영화 조명에 "불쾌하다"는 감독도



이번 책에선 ‘갯마을’ ‘개 같은 날의 오후’ ‘번지점프를 하다’ ‘왕의 남자’ ‘아가씨’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등 대중에 알려진 영화들을 퀴어영화로서 재해석한 리뷰도 실렸다. 이 중 주요 작품은 서울프라이드영화제 기간 상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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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가 등장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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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김조광수 집행위원장은 9일 포럼에서 “영화제를 해오며 ‘내 영화는 퀴어영화가 아닌데 불쾌하다’는 감독의 반응에 상영을 못 한 영화들이 있었고 올해도 ‘왜 빠졌지?’ 싶은 영화 중엔 그런 작품이 있다”면서 “이번 책을 많이 지지하고 응원해준다면 내년엔 더 깊숙한 발굴 작업을 해볼 수 있을 것” 이라고 밝혔다. 『한국퀴어영화사』는 독립 서점을 중심으로 오프라인 판매될 예정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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