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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윤병락 "궤짝 박차고 나온 내 사과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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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랑서 개인전 여는 '사과작가'

10호~200호 규모 20여점 내걸어

'우주' 심은 지름 2m 대형작품도

하루12시간 작업…16년째 1000점

인기넘는 '예술적평가' 바람 있어

이데일리

작가 윤병락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노화랑에 건 자신의 작품 ‘가을향기’(2019·가변사이즈) 앞에 섰다. ‘궤짝을 박차고 나온 사과’들을 벽에 드문드문 얹어낸, 회화로 ‘설치’를 시도한 작품이다. 오로지 사과에만 집중하는, 6년 전부터 구상했던 형태라고 했다(사진=김태형 사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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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숙명적인 만남이란 것이 있다. 살다 보니 그랬다. 어렴풋이 짐작을 하면서 혹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채, 그 무게를 떠안는 일이 있더란 얘기다. 그에게 숙명은 ‘길거리 좌판’이었다. 그날 그가 그 좌판을 무심히 지나쳤다면, 아니 그 위에 무더기로 올려놓고 팔던 것이 사과가 아니었다면 그의 작품은, 인생은 어찌 달라졌을 텐가.

“우연찮게 길거리 좌판에서 과일을 사면서 사과사진을 몇 컷 찍었다.” 2000년대 초반 대구. 그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 ‘사과’는 그가 대신 팔게 됐다. 이름 하여 ‘없어서 못 파는 사과그림’이다. 내놓자마자 마치 기다린 듯 팔려나가니까. 실제 마냥 기다리기도 해야 한다. 그이가 파는 사과 한 입 베어 물려는 이들이 차고 넘치니까. 특히나 이 가을, 햇살과 바람과 땅의 기운을 다 끌어안은 그 알알이 때론 붉고 때론 푸른 빛을 내뿜는 이때. 그의 사과로 어김없이 7번째 장을 연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노화랑에 말이다.

평일 이른 오후 전시장. 누가 미술시장이 불황이라 했던가. 아이돌 인기는 ‘저리 가라’다. 비로소 작가를 알아본 이들이 앞다퉈 ‘한 컷’을 부탁하는 줄은 끊기가 어려울 정도다. 일일이 ‘사람 좋은 환한 얼굴’로 응대하던 ‘스타작가’. 어쩔 수 없이 납치하듯 그를 이끌어내 마주 앉았다.

△사과는 소재일 뿐…변형캔버스에 관심

윤병락(51). 세상은 그를 ‘사과작가’라 부른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실물과 다를 바 없는 사과를 화면에 ‘심어낸’ 지 16년째니 이상할 것도 없다. 자신의 이름을 전시명으로 대신한 이번 ‘윤병락’ 전에 그는 사과그림 20여점을 걸었다. 늘 그랬듯, 10호(53×46㎝)부터 100호(162×130㎝), 200호(260×194㎝)를 넘나드는, 소담하게 담아낸 사과를 부감법(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리는 기법)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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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락 ‘가을향기’(2019). 신문지를 채워넣은 사과궤짝에 든 붉은 사과를 위에서 내려다본 듯 부감법으로 그리는 ‘사과그림’은 윤 작가 작품의 원형을 이룬다. 슬쩍 얹은 나뭇가지는 그림에 숨통을 틔우기 위한 장치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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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는 거 아닌가. “왜 굳이 사과를?” 사실 이 질문에는 어느 정도 기대했던 답이 있다. 경북 영천, 국내 최대 사과산지가 고향이라는 그가 할 만한 대답. 그런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학 다닐 때부터 변형캔버스에 관심이 많았다”가 답이었으니. “입시미술이나 입시교육에 따라 항상 프레임에 갇힌 화면을 구성해야 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다. 그 틀을 깨는 실험이나 연구를 계속했던 거고.” 결국 이런 소리가 아닌가. 정형화한 캔버스를 벗어나는 작업이 우선이고 사과는 그 작업을 위해 선택한 소재에 불과했다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역사’를 되짚을 필요가 있다. ‘초현실주의적 정물’을 즐겨 그렸던 초기부터. 대학 3학년이던 1993년 ‘제12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화단의 관심을 끈 ‘기억재생’(1993)이란 작품을 보자.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위에 걸친 채 앉아 있는 한 남자의 가슴팍이 시선을 끄는 작품. 팔뚝을 타고 오른 힘줄까지 세밀히 묘사했지만 특이한 건 그 남자 가슴에 달린 창이었다. 지평선 속으로 길게 놓인 기찻길이 시원하게 뚫린. 이를 두고 윤 작가는 “꽉 막힌 구도를 깨고 원근감을 줘 캔버스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캔버스를 비집고 나오는 첫 시도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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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락 ‘기억재생’(1993). 대학 3학년이던 1993년 ‘제12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작품이다. 인터뷰 중 2017년 진서문화교육재단이 발간한 도록 ‘윤병락’에 실린 그림을 윤 작가가 직접 펴서 보여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본격적인 ‘변형캔버스’는 접시나 반닫이에 가위·솥뚜껑·인두 등 전통 민예품을 얹어 그린 ‘보물창고’(1999∼2003) 시리즈에서 보인다. 규격 화면을 벗어나는 건 물론, 그림 안 정물이 실제로 삐죽이 튀어나온 파격적인 변형 말이다. 이후 2004년 세상에 첫선을 보인 ‘사과’ 시리즈가 그 뒤를 이은 건 물론이다.

보통의 캔버스로는 할 수 없는 이 작업을 위해 작가는 합판에 삼합지 이상의 한지를 두툼하게 배접한 작가만의 틀을 만든다. 그 위를 메디움으로 3~4번 코팅하고 잘 말린 뒤 그제야 유화물감으로 붓질을 하는 거다. 그래선지 그이의 작품엔 배경이 없다. 사과궤짝이 통째 벽에 걸 듯하다고 해야 할까. “맞다. 변형캔버스로 공간을 생각하는 거다. 그림이 걸린 공간이 배경이 되고, 벽 전체가 그림의 일부가 되는 거다. 공간을 확장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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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락 ‘가을향기’(2004). 윤 작가가 그린 첫 ‘사과그림’이다. 요즘의 부감법이 아닌 옆에서 바라본 사과궤짝을 담아낸 당시의 몇 작품 중 한 점이다. 규격 화면을 벗어난 변형캔버스의 ‘역사’가 보인다(사진=윤병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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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사과를 주시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건 공간의 확장’이란 콘셉트는 이번 전시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바로 ‘궤짝을 박차고 나온 사과’들인데. 낱개 혹은 무더기의 사과를 벽에 드문드문 얹어낸 ‘가을향기’(2019)가 그것이다. 사과 위에 걸쳐놓던 나뭇가지도 치워버리고 궤짝 안에 깔아두던 신문지도 빼버린, 오로지 사과에만 집중한 형태인 셈이다.

아니 이것으로도 부족했나 보다. 지름이 208㎝에 달하는 초대형사과(‘가을향기’ 2009)까지 선보이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스케일이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사과를 두고 윤 작가는 ‘우주론’을 말하고 있으니. “사과를 확대해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유심히 들여다보니 우주가 보였다”는 거다. “성운도 보이고 별도 보이고 블랙홀도 보이더라.” 틀린 말은 아니다. 사과 한 알을 만들기 위해선 태양과 물이 절대적이니, ‘우주를 품은 사과’라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우주를 끌어낸 입체감 물씬한 사과. “회화도 설치가 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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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락 ‘가을향기’(2019). 이번 전시에서 화룡점정을 찍은 지름 208㎝의 초대형사과. 윤 작가는 이 안에서 ‘우주’를 봤다고 했다. 성운과 별, 블랙홀까지 든 ‘우주의 에너지’를 온전히 품은 사과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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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성 무기로 16년…진화하는 사과

“전투적으로 작업한다.” 경기 일산 작업실에 틀어박혀 하루 12시간 이상씩 몰입하는 생활이 십수년째다. 1년 평균 60점씩 그렸다니 사과그림만 족히 1000점은 넘겼을 터. 합판에 스케치하고 틀 만들기부터라는 그 지난한 노동의 결과물이 말이다. 그나마 최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주문제작’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것. 전시가 한 번씩 끝날 때마다 밀려들던 부담을 덜어내는 대신 해외시장을 겨냥한 작품을 모으기로 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완판작가’의 명성이야 어딜 가겠는가. 그이의 작품 앞에선 지갑 열기를 주저하지 않는 마력 같은 것 말이다. 분수령은 2008년 홍콩크리스티경매였다. 출품한 ‘가을향기’가 48만7500홍콩달러(약 7300만원)에 팔려나가며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그에 대한 기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호응에 배신하지 않은 건 16년을 하루같이 산 성실성이 아닐까. 해마다 나오는 사과가 ‘그놈이 그놈’인 듯하지만 그이의 사과는 지금도 진화 중이니까. 그 덕일 거다. 작품가격이 덩달아 상승한 건. 현재 200호 8000만원, 100호 4200만원선에 거래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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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윤병락이 자신의 작품 ‘가을향기-공존’(2019) 앞에 앉았다. 사과와의 인연을 묻자 윤 작가는 “모든 일이 그렇지 않나. 찰나에 반짝 떠오르든, 우연찮게 만들어지든 결국 순간의 영감으로 이뤄지더라”고 담담히 말했다(사진=김태형 사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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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지만 이런 질문은 어떨지. 바라는 게 더 있다면? 별 망설임 없이 “예술적인 평가를 받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핏 우리가 늘 터트려온 찬사 ‘진짜 같다’ ‘사진 같다’를 넘어서고 싶다는 뜻이 읽혔다. 이는 그가 ‘극사실주의’란 타이틀을 한사코 마다한 이유처럼도 보이는데. “사과는 조형적 요소일 뿐 시각적인 착각만 일으켜주면 된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그의 목표가 ‘더 정교하게 더 똑같이’가 아니란 건 분명해졌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생각도 바뀌고 미의식도 바뀌는 세상에 그저 상투적인 재현으로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전해지니. 다행이지 싶다. 우리가 그이의 사과 앞에서 나눌 세상얘기가 한층 풍성해질 거란 뜻이기도 할 테니. 전시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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