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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조선의 마지막 자주 개혁 기회를 앗아간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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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자 교수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출간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우리 민족의 명운을 가른 19세기 후반기에 악랄한 국권 침탈과 가혹한 경제 수탈로 조선 왕조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외세의 선봉이라고 하면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근대사 전문가인 이양자 동의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조선이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외세에 예속되는 길을 걷게 만든 결정적 인물로 청조 말기의 풍운아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를 꼽는다.

임오군란(1882년)에서 청일전쟁(1894년)에 이르는 10여년간 조선이 자주권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원세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규명한 이 교수의 신간은 제목에서는 '위안스카이'라는 인명을 쓰고 있지만, 정작 책의 본문에서는 같은 사람을 시종일관 '원세개'로 지칭한다.

이 같은 '이중 인명'은 그가 차지한 역사적 자리의 한 성격을 반영한다. 중국인의 이름은 중국 역사에서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는 신해혁명(1911년)을 기준으로 그 전의 인물은 우리식 한자음으로, 그 이후는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신해혁명 이전인 1859년 태어나 그 이후인 1916년에 사망한 그는 '원세개'일 수도, '위안스카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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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원세개 (한울아카데미 제공)




조선이 안팎의 모순을 극복하고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추구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할 임오군란~청일전쟁의 시기에, 중국 역사상 손꼽을 만큼 교활하고 음흉하면서도 추진력과 정세 판단이 뛰어났던 간웅이 국권을 좌지우지했던 것이 조선 왕조, 나아가 우리 민족의 불운인지도 모른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국은 조선 정세에 개입하기로 하고 수사제독(水師提督) 오장경이 이끄는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원세개는 오장경의 막하로 조선땅에 들어왔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에 불과했으나 민비의 정적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해 연금하고 반군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을 보호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조선은 물론 본국 청의 정치 무대에서도 뚜렷이 존재감을 부각했다.

문필에 재능이 없어 과거를 포기하고 일찍이 군문에 들어간 원세개였으나 무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리더십과 결단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에 진출한 청군 병졸들의 기율이 느슨해져 민가를 약탈하는 등 문제를 야기하자 원세개가 오장경에게 실태를 보고해 군율 확립의 권한을 위임받고서는 민가 출입이나 대열 이탈 등의 위반 행위를 저지른 병졸 여러 명을 참수하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군 간부들도 본국에 귀환시킴으로써 장졸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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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원세개 (연합뉴스 자료사진)



대원군과 고종, 민비, 일본과 청국의 군대 등 모두가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임오군란 와중에 대원군을 제압하는 것만이 청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길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를 납치해 청국으로 압송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조선 군사들을 제압한 것도 원세개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원세개는 조선 신식 군대의 창설을 주도해 1883년 1월에는 2천여 병사의 총수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갑신정변에서는 더욱 결정적 역할을 맡는다. 1884년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개화파들이 거사해 중신들을 살해하고 신정부를 수립하자 원세개는 직속 상관인 오장경은 물론 청국의 실력자인 이홍장까지도 건너뛰어 독자적 판단으로 개화파와 이를 지원하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삼일천하'에 종지부를 찍었다.

1884년 11월 일시 귀국했다가 다음 해 8월 다시 조선으로 온 원세개는 사실상 현대적인 의미로 식민지 총독과 비슷한 '감국대신(監國大臣)' 역할을 하게 된다.

청과 조선은 명목상 종주국과 번국의 관계였지만 양국의 역사에서 청의 관리가 조선에 주재하며 온갖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는 총독 행세를 한 것은 원세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원세개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감시하는 것은 물론 조선 해관(海關·현대의 세관과 유사)을 중국 해관에 통합·종속시켰고 조선의 차관 문제도 낱낱이 간섭해 청국으로부터만 차관을 얻도록 했으며 전신·통신 분야의 시설도 청국이 선점 및 독점토록 하는 것과 함께 청국 선박에 조선의 연해와 주요 강에 대한 독점적 운항권을 부여하는 등 경제적 침탈에도 열을 올렸다.

원세개의 비호를 받은 청국 상인들은 버젓이 밀무역을 일삼았고 이를 단속하는 조선 관청을 습격하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원세개의 '활약'으로 조선 경제에서 청이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더 일찍 조선에 진출한 일본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사유가 됐다.

조선에서 조정 위에 군림한 원세개는 심지어 조선에 머무는 10여년 동안 세 명의 조선 여인을 취해 7남 8녀를 둘 정도로 군주에 못지않은 향락을 누렸고 이 같은 그의 '황금기'는 청일 전쟁에서 패해 청국으로 쫓겨간 1894년에야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저자인 이양자 명예교수는 책의 맺음말에서 "임오군란~청일전쟁의 시기는 그야말로 날로 격화되는 세계적 제국주의 상황에서 조선에는 짧지만 자주 개혁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이었는데 이 황금같은 시기가 원세개의 기막힌 간섭과 책동으로 유실되고 말았다"고 밝혔다.

한울엠플러스. 240쪽. 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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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why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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