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포스터. /사진제공=엣나잇필름 |
프랑스 감독 루이 말(Louis Malle)은 1987년에 만든 ‘굿바이 칠드런’으로 같은 해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1932년 출생인 감독은 전쟁이 끝났던 해인 1944년 1월 어느 날 아침을 40여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유대인 친구 보네가 게슈타포에 잡혀갔던 날이다.
이후로 성장영화에서 ‘굿바이 칠드런’은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 잡아 수많은 작품들이 같은 모티브를 활용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있기 마련이다. 김보라 감독의 자서전 격인 영화 ‘벌새’에서도 루이 말 감독이 건네줬던 감동이 느껴졌다.
14살 중학생 소녀 은희(박지후 분)는 아버지(정인기 분)와 어머니(이승연 분), 언니와 오빠와 살고 있다. 그리고 한문 과외를 같이 하는 단짝친구, 사랑하는 남자친구, 갑자기 나타나 특별한 관계에 놓이게 된 후배뿐 아니라 권위적인 담임, 무심한 한문학원 원장, 배려 깊은 의사선생님, 절망에 빠져 자살한 외삼촌 등등 많은 주변 인물들이 있다. 여기에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영지 선생님(김새벽 분)까지. 이들은 은희의 삶에 이렇게 저렇게 개입을 하고 그 때마다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모두 은희의 14살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이다. 제45회 시애틀국제영화제에서 평한 대로 이는 “보편적인 그러나 구체적인” 기억이다.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날개짓을 한다는 벌새만큼이나 몹시 분주하다. 너무 빨라 사람 눈으로 미처 인식이 안 되지만 그 정도로 날개를 바삐 움직여야 멈춰있는 상태에서 먹이를 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벌새’라고 제목을 단 이유는, 비록 은희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에 무한히 바쁜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차분해 보이는 인상의 배우를 은희 역에 골라 넣었고 오히려 그녀 주변 인물들이 다들 부지런히 움직인다. 은희의 맘을 바쁘게 만들려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은희를 알려면 주변 인물들의 움직임을 감지하세요!’ 감독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영화 ‘벌새’의 한 장면. /사진제공=엣나잇필름 |
다음으로 감독이 힘을 기울인 점은 은희의 보편적인 삶에 시대의 소리를 대입시켜 넣은 것이다. 오로지 일류대학만 바라보는 중등교육, 은희의 등하굣길에 눈에 띄던 철거민들의 현수막, 평범한 가장을 자살로 몰아넣은 악마적인 사회구조, 그리고 목표지향적이었던 개발독재의 처참한 민낯을 보여준 성수대교 붕괴 등. 감독은 사태의 본질을 깊이 알 수 있게 시대의 소리를 잘 섞어 넣었다. 특히 성수대교 붕괴는 세월호의 복사판이라는 느낌까지 들었다. 또한 굳이 설명적인 대사나 장면을 붙여 넣지 않은 연출도 돋보였다. 은희가 영지 선생님의 방을 그저 둘러보거나 거실에서 팔짝팔짝 뛰는 것을 보기만 해도 관객은 충분히 감독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세련된 연출이다.
사실주의 영화의 중요한 기준들 중의 하나는 냉정한 관찰이다. 감정이입이나 왜곡된 카메라 구성을 가급적 배제한 채 눈에 보이는 실상을 잡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주의 영화의 본래 목적은 아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오히려 사태의 진실한 성격을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붕괴된 성수대교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은희 자매와 식탁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은희 오빠에게서 시대를 강타했던 비극의 실체를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볼 때 영지 선생님의 죽음은 작위적인 냄새가 좀 풍겨났다.
1994년 10월에 나는 독일에 있었다. 내가 다녔던 독일대학에서 마침 한국 신문을 구독하는 덕분에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접했고, 다음 해에 삼풍백화점 붕괴까지 겹쳐져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벌새’가 뿜어내는 기운을 통해 이제 그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아마 당시 평범한 소녀였던 감독의 숨은 사연을 들어서인가 보다.
영화 ‘벌새’의 한 장면. /사진제공=엣나잇필름 |
저명한 독일의 문화평론가인 W. 벤야민(1892-1940)은 ‘기억’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아직 변제되지 못한 과거의 요구들, 지나간 세대들의 희생과 패배와 절망을 현재에 변제, 이행, 성취해야 한다는 과제와 그 과제를 이루어낼 힘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최성만 번역 『발터 벤야민의 기억의 정치학』 중에서)고 한 바 있다.
과거의 어떤 사건도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후대의 누군가가 선택적으로 기억해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렇게 기억해낸 과거를 분석해 활성화시키면 그 때서야 비로소 과거가 힘을 갖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벌새’는 우리 시대의 좌표를 제시하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이쯤에서 감독이 세월호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은희’를 영화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아마 우리에게는 세월호가 여전히 ‘변제되지 못한 기억’이어서인가 보다. 김보라 감독의 솜씨라면 세월호를 훨씬 가까이서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벌새’는 한국에서 상영되기 전에 외국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24개 영화제라는 광고도 있고 25개 영화제라는 홍보도 있어 조금 불안하다. 왠지 이런 식의 계량적인 숫자 나열이 영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벌새’는 분명 그 이상의 작품인데 말이다. 올해 나온 모든 영화들을 섭렵한 것은 아니지만 만일 내가 어느 영화상의 심사위원을 맡을 경우 반드시 올해의 최우수작품으로 추천하고픈 심정이다. 잘 만든 영화다.
박태식(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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