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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할인에 미쳐 있어요”…D 공포 부르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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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lation 공포, discount 전쟁

“제값 주면 바보” 저가 경쟁

소비여력 감소 → 할인 공세…산업계 ‘침체 악순환’ 그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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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면 안되는 걸 우리도 압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것이죠.”

최근 ‘초저가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한 대형마트의 간부 ㄱ씨는 17일 이렇게 토로했다. ㄱ씨는 “지금 할인 폭은 지나쳐 회사 수익성에 문제가 발생할 정도”라면서도 “이렇게 할수록 소비자들은 더 많은 할인을 기대하는 것 같아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식품업계 마케팅 담당 ㄴ씨는 “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요즘 할인에 미쳐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우리끼리 한다”며 “할인 프로모션이 없으면 판매가 안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요즘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무슨 물건이든 제값 주고 사면 바보”라는 인식이 퍼질 대로 퍼져 있다. 전형적인 디플레이션 징후다. 경향신문이 산업 현장을 점검한 결과 ‘D(디플레이션)의 전조’는 무시하기 힘들 정도였다.

물가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대형마트들은 저가전쟁을 벌이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는 이날도 ‘에브리데이 국민가격 제4탄’이라며 ‘반값 식용유’ 등 14종의 초저가 제품을 선보였다. 8월부터 지금까지 내놓은 초저가 상품은 140여종으로, 이들 대부분의 매출이 급상승했다. 롯데마트는 생수·물티슈·와인 등에 ‘극한가격’이란 이름을 붙여 50~70% 할인으로 맞대응 중이다.

그러나 시장분석가들은 3분기 양사의 영업이익이 지난해에 비해 24~81% 급감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온라인몰 쿠팡 등이 주도한 저가 판매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쿠팡도 지난해 1조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

유통업계뿐 아니라 자동차 등 제조업에서도 ‘난투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할인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현대 세일즈 페스타’란 이벤트를 통해 자동차 가격을 10% 할인해주고 있다. 르노삼성과 한국지엠은 물론이고 수입차 업계도 할인경쟁에 뛰어든 상태다.

오비맥주가 카스맥주 출고가를 4.7% 인하하는 등 가격을 내리지 않은 제조 분야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할인경쟁이 확산되고 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지난 9월에야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한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란 게 기업들의 반응이다.

디플레이션은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소비 여력이 감소하고, 수요 하락을 해소하기 위해 공급자인 기업들은 가격을 낮춘다. 소비자들은 가격이 더 낮아지기를 기대한다. 소비는 더 줄어들고 경기는 더욱 하강해 돌이키기 어려운 침체에 빠지게 된다. 통계청이 발표한 9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처음으로 마이너스(-0.4%)를 기록하면서 제기된 디플레이션 조짐이 ‘D의 공포’라 불리는 이유다.

■온라인몰 가격 인하에 오프라인도 출혈 경쟁…결국 승자 없어

“물가가 계속 떨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면 경제 위기”

국내에서는 ‘온라인 강국’이란 독특한 요소도 작용한다. 소비 여력 감소가 온라인몰의 저가 판매를 키우고, 이 현상은 오프라인 업계의 할인 공세로 연결되며, 결국엔 소비 하락과 더 극심한 출혈 경쟁을 낳고, 이는 수요 부진과 기업 수익성 악화 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구조란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부작용을 간과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정부 당국자들은 ‘물가가 낮아지면 좋은 것 아니냐’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유통업계 구조 개편에 따른 출혈 경쟁 등에 대해서도 ‘누가 얼마를 벌든 내수 판매는 제로섬 게임’이란 식으로 관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쿠팡 같은 업체들의 혁신적 저가 시스템이 먹혀드는 등 온라인 기반의 유통구조 변화를 들며 최근 징후는 ‘좋은 디플레이션’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온라인몰의 인기도 경기 둔화에 따른 소비 여력 감소와 무관치 않은 데다, 기업 혁신에 따른 가격 하락도 결국 ‘D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온라인이 주도하는 가격 하락을 생산성 상승에 따른 물가 하락이라고 보더라도, 결국 물가 상승 기대가 마이너스로 바뀌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이 또한 결국 디플레이션을 야기하는 요소”라며 “사람들이 물가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디플레이션의 핵심이며, 이렇게 되면 소비와 투자가 미뤄지고 국가 경제가 위기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밝혔다.

홍재원 기자 jwh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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