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전공 교수 / 사진제공=외부 |
작년 10월말 한국 대법원은 일제 불법 점거하에서 가혹한 노동착취에 시달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개인청구권을 인정하고, 일본제철 등 전범기업이 피해자에게 1억원의 정신적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일본은 청구권협정을 깨트린 국제법 위반, 심지어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반발하였다. 일본정부의 적반하장식 경제보복이 있었고, 이에 맞대응한 한국측의 지소미아 종료선언이 이어지면서 한일관계는 양국간 국교정상화 이래 최대 위기로 평가되고 있다. 금년 말이나 내년 봄 일본 전범기업의 자산매각이 현실화될 경우, 한일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사태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이를 사전에 예방할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작년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강제징용 소송은 급격히 늘었다. 이미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원고단에 승소판결이 나왔고,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접수된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모두 19건이며, 대부분 원고단에 유리한 판결이 나올 것이다. 일본 전범기업은 보상을 거부할 것이고, 그럴 경우 일본기업에 대한 보상판결과 강제집행이 양국 정부와 국민을 끌어들여 심각한 갈등과 분쟁으로 치달을 것이다. 한국정부는 6월 19일 한일 양국기업의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피해자 동의를 얻어 보상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한국정부는 삼권분립이 엄연한 대한민국에서 행정부가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며,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자칫 한국정부가 적극 개입하여 한국정부+한국기업+일본기업이라는 ‘2+1’ 구도로 피해자 보상을 추진할 경우, 행정부의 대법원 판결 거부 내지 지나친 월권으로 비춰질 수 있으며, 국내에서 위헌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정부가 공식적인 강제동원 보상주체로 나설 경우, 문제 투성이인 1965년 체제로 역행할 소지마저 안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한일 양국은 식민지배에 대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고, 이후 한국정부는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요컨대, 한국정부는 사법부 판결을 존중해야하며, 민사소송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 일본기업이 당연히 보상기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간 청구권협정으로 최종적이고 완전히 종료되었고, 따라서 일본정부나 기업은 절대 피해자 보상기금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직접 책임지고 특별법을 만들어 국내조치를 통해 피해자 보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 일본기업에 법적인·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협상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럼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대승적인 차원에서 청구권 자금으로 성장한 국내 기업이 일단 기금을 구성하여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이 낫다. 먼저 한국정부가 청구권자금 국내 16개 수혜기업이 도의적인 차원에서 기금을 만들도록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해야 한다. 이를 국내 기업이 수용할 경우, 약 300억원 보상기금을 설립하여 피해자들에게 판결 금액을 보상하는 것이다.
물론 청와대가 사전에 원고단과 밀도 높은 대화를 통하여 대법원 승소 판결이 나온 32명의 피해자들이 보상금 56억원을 수령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만일 피해자가 수령을 거부할 경우, 불가피하게 공탁제를 적용하여 동의없이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연내에 실질적인 피해자 보상이 진전될 경우, 일본정부나 기업·언론과 국민들은 한국 기업의 결정을 크게 환영할 것이다. 당연히 일본 전범기업들이 피해자 보상기금에 참여하는 길도 열리게 된다. 한국정부는 10월22일 일왕 즉위 축하식 사절단 파견을 앞두고 있다. 한일 양국 정상간 직접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해법을 도출해야 한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양기호 성공회대(일본학 전공) 교수 dawn2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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