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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지나간 시간 속 스러져가는 슬픈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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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채 소설집 ‘검은 설탕의 시간’

세계일보

양진채(사진)의 두 번째 소설집 ‘검은 설탕의 시간’(강)은 스러져가는 기억을 되살리는 애도의 서사가 지배하는 분위기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 속에서 부유하는 것들은 사라지고 아래로 가라앉은 것들만 남는 법이다. 표제작은 이러한 사유를 검은 설탕을 매개로 애틋하게 드러낸다.

인천 내항 부두 하역노동자였던 아버지는 그리 춥지도 않은 날부터 내복 바지를 입고 그 위에 작업복 바지를 입은 뒤 고무링으로 밑단을 조이고, 화물선이 들고 나는 시간에 맞춰 일하러 나갔다. 아버지가 퇴근하면 작업화를 벗고 양말을 벗기 전 엄마가 마룻바닥에 보자기를 깔았고, 아버지는 보자기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바지 밑단을 조였던 고무링을 빼내면 내복 바지와 작업복 바지 사이 종아리까지 차 있던 검은 설탕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그 설탕을 담은 대접에 물을 부으면 갈색 물 위로 먼지, 지푸라기, 기름 등 부유물이 떴다. 드물게 오염되지 않은 일상과 마주했을 때 화자는 그 검은 설탕이 녹는 시간을 떠올린다.

“문득 그때 그 검은 설탕이 물에 풀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떠다니는 부유물만 따라내면 그 아래에 녹고 있는 다디단 설탕이 있지 않은가.”

세계일보

치열하게 젊은 시절을 보냈고 자전거포를 운영하며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다가 간암 판정을 받고 한달여 만에 세상을 떠나버린 남자가 여러 편에 공통으로 등장한다. ‘애’에 등장하는 수경의 남편이 대표적인 경우다. 젊은 시절 수경과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남편은 ‘간’이라는 ‘애’가 망가져 창졸간에 떠나버렸는데, 옛날의 ‘동지’들은 홍어의 간과 창자를 일컫는 ‘애’를 안주로 시켜 술을 마시며 “타버린 애 대신 홍어 애라도 한 점 더 먹자”고 무심하게 말한다.

역시 같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마중’의 남편도 세월호 참사 때 “세상이 울둘목이고 맹골수도로 보인다”고 했는데, 3년 동안 묻혀 있던 배가 올라오던 날 아내는 그 말이 생각나 아득해진다. ‘북쪽 별을 찾아서’의 정호 형도 간암으로 황달까지 와서 별다른 의료행위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무선을 배웠던 그와 더불어 포구 횟집에서 무전을 보내는 놀이를 했던 이들은 “이 포구 어디쯤 우리의 빛나던 청춘이 스돈스돈돈스돈스돈돈돈, 무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위무한다.

북성포구, 수문통, 자유공원, 송도유원지 등 대부분 인천 지역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번 소설집에는 이밖에도 ‘플러싱의 숨쉬는 돌’, ‘부들 사이’, ‘허니문 카’ ‘베이비오일’ ‘참치의 깊이’ ‘드라이작 클래식 200mm’ 등 모두 10편이 수록됐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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