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8일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의 한국은행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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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년의 썸타는 경제]'GDP 갭률'로 본 디플레 논쟁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0.4%)를 기록하자, 국회에선 '디플레이션(Deflation) 논쟁'이 일었다. 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국은행 국정감사에서다. 디플레이션이란 혈압으로 따지면 '저혈압'으로 오랫동안 경기 침체와 물가 하락이 동시에 진행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여야를 가리지 않았다. 홍일표 자유한국당 의원은 "전문가들은 지금이 디플레이션 초기라 말한다"고 지적했다.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한은이 물가 관리에 눈치를 보면서 디플레이션 징후가 커진다는 우려가 있다"고 짚었다.
'디플레 우려'가 나올 때마다 정부 대답은 일관됐다. 총수요 위축에 따른 구조적인 물가 하락이 아니라, 농·축·수산물 가격 하락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란 것이다. 채소 가격이 오르는 겨울이 오면 자연스럽게 물가가 다시 오를 것이란 전망도 내놓는다.
저물가 지표를 읽는 정부 시각은 중요하다. 저물가가 수요와 투자, 경기 부진 등 구조적 위기에서 출발한다고 보면 당장 이를 해소할 대책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시적 현상으로 보면 정부 대응도 소극적이 된다. 문제는 최근 저물가가 구조적인 경기 부진에서 출발했다는 증거가 상당한데도 이를 부정하는 듯한 정부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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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 가늠자' GDP 갭률 8년 연속 마이너스
9일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갭(GAP)률'은 -0.88%(잠정치)로 2012년(-0.81%) 이래 8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 중이다. 디플레 압력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일본 역시 GDP 갭률이 장기간 마이너스를 보였지만, 계속해서 올라 2017년부터 한국을 앞질렀다. IMF와는 다른 경제모형을 쓰는 한국은행도 지난달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 추정' 보고서를 통해 올해 한국의 GDP 갭률이 마이너스로 전환했다고 밝혔다. 한은은 내년에도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10년 간 한국의 GDP 갭과 소비자물가 상승률.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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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간 주요국의 GDP 갭.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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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갭률'은 총수요 위축에 따른 '디플레 압력'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 중 하나다. 실제 GDP에서 잠재 GDP(한국 경제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GDP)를 뺀 'GDP 갭'을 잠재 GDP로 나누면 'GDP 갭률'을 구할 수 있다. 실제 GDP가 잠재 GDP를 웃돌아 이 값이 플러스를 나타내면 경기 과열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다는 의미이고, 반대로 마이너스를 보이면 불황으로 디플레이션 압력이 강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가령 매년 100만대의 스마트폰을 생산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고 가정하자. 경기가 좋아져 120만대의 스마트폰 수요가 생긴다면 회사는 고용을 늘리고 원가 상승 요인을 반영해 제품 가격을 올리게 된다. 총수요가 '생산능력'을 웃돌아 'GDP 갭률'이 플러스가 되는 경우다. 반대로 불황으로 스마트폰 수요가 80만대에 그친다면 회사는 고용을 줄이고 스마트폰 가격도 하락하게 된다. 총수요가 '생산능력'에 미치지 못해 'GDP 갭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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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갭 수렁'에 제조업 위축…과거 정부서도 헤어나려 노력
국내 주력 산업인 제조업 경기가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해 30·40대 '경제 허리' 세대 고용이 위축되는 배경도 'GDP 갭률'이 장기적인 마이너스 상황에 놓인 것과 관련이 깊다. 일시적 해외 관광객 유입에 따른 청년층 아르바이트 증가와 단기 노인 일자리 사업 등으로 청년·노년층 고용률이 높아졌다고 정부가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란 의미다. GDP 갭률을 플러스로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
역대 정부에서도 실제 GDP를 잠재 GDP보다 높여 '마이너스 GDP 갭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정책을 폈다. 지난 정부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15년 2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 아래로 떨어진 0.6%를 기록하자 "디플레이션 상황"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이후 정부는 그해 3월부터 2016년 6월까지 1년 반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기준금리를 3차례 내렸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11조원 이상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해 재정 지출에도 나섰다. 2017년부터 출범한 문재인 정부 역시 역대급 '슈퍼 예산'을 편성하는 등 '나랏돈 풀기'에 나섰지만, 마이너스에 빠진 GDP 갭률을 돌려세우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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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디플레 취약성 지수, 현 정부 들어 3배 상승
문재인 정부 들어 '디플레이션 위험'은 더 커졌다. IMF가 집계하는 '디플레이션 취약성 지수(Index of Deflation Vulnerability)' 산식대로 한국은행이 한국의 디플레이션 취약성 지수를 집계한 결과, 이 지수는 2016년 0.09에서 2019년 3분기 0.27(잠정)로 3배 상승했다. 이 지수는 0~0.2 사이이면 디플레이션 위험이 '매우 낮음', 0.2~0.3은 '낮음', 0.3~0.5는 '보통', 0.5 이상이면 '높음'을 나타낸다. 올해 잠정치대로 0.27 정도를 기록한다면 디플레이션 위험은 '낮음'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순 있지만, '매우 낮음' 수준에서 다음 단계로 이동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측면에서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최창호 한국은행 물가동향팀장은 "올해 2분기 0.18을 기록한 디플레이션 취약성 지수가 3분기에 와서 0.27로 올라간 것은 경제성장률이나 자산 가격 변화가 크게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소비자물가지수가 크게 하락한 것이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디플레이션 취약성 지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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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 단정은 이르지만, 위기 가능성 일축해선 곤란
물론 전문가들은 지금 상황을 디플레이션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 스스로 "일부 야당과 언론이 디플레이션 위기를 부풀리고 있다"며 위기 가능성을 일축하는 것 또한 위험한 태도라고 지적한다. 디플레이션 위기는 재정과 통화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의 태도에 따라 정책 개입 타이밍이 정해지고, 이에 따라 실제 디플레이션으로 빠지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례로는 일본이 있다. 일본 경제기획청은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 디플레이션을 겪기 직전인 1991년 당시 "일본 경제가 경기 확장 국면에 있다"며 적극적인 경기 활성화 정책 마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본 정부는 당시 GDP 갭률의 마이너스 전환 가능성 또한 일축했다. 1997년에는 소비세 인상 등 재정 긴축 정책마저 폈다. 그 결과 일본은 1993년부터 올해까지 27년 동안 4개 연도를 제외하고 마이너스 GDP 갭률을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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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오판해 근시안적 정책 운용…디플레 겪은 일본과 비슷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한국 경제를 일컬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경제정책 당국도 저물가 상황을 농·축·수산물 가격 하락과 복지지출 확대 등 내수 부문에 국한한 '일시적 현상'으로만 해석한다. 이런 경기 인식을 바탕으로,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9월 국내 경기가 정점을 찍고 하강하는 국면에서도 민간 투자에 부담이 될 수 있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법인세 인상, 탈원전, 시장 가격을 무시한 부동산 규제 정책 등을 폈다. 여기에다 경기 수축 국면에서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에 따라 한국도 금융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2017년 11월 이후 두 차례 기준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 오판으로 금리 인하 시기를 놓치고 단기적 시야로 경제정책을 운용하다 '잃어버린 20년'을 맞았던 일본 정부와 대응 양상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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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신뢰 구축해야 확장 재정도 원활…통화·규제도 완화해야"
전문가들은 '디플레이션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통화정책 완화, 재정 확장, 규제 완화, 법인세 인하 등 민간 투자를 늘리기 위한 정책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도 최근 한국을 방문해 "디플레이션을 막으려면 뒷북보다는 과잉대응이 낫다"고 말했다. 다만 나랏돈을 '제대로' 풀려면 정부가 재정 건전성 확보에 대한 신뢰를 쌓아야 한다.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는 "정부가 재정 관리를 소홀히 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면, 나랏돈을 풀더라도 국민이 미래를 대비하느라 소비를 하지 않는다"며 "'선 신뢰 구축, 후 재정 확장' 순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에선 '충격 요법'으로 고환율 정책도 검토해 볼 만하다고 주장한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환율조작국이란 오명을 쓰더라도 원·달러 환율을 1300원 정도로 올리는 '고환율 정책'을 쓰면 수출품 가격 하락으로 수출도 살고, 수입 물가 상승으로 물가 하락도 막을 수 있다"며 "금리를 낮추거나 재정을 푸는 것보다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귀띔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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