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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2인 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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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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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데서 하도 보이스피싱을 주의하라 하니 모르는 번호가 뜨면 아예 받지 않지만, 같은 번호로 연달아 오면 혹시 가까운 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받고 보니 어느 날은 가스점검원이었다. 수화기 건너편 그는 몇 번씩 전화해도 왜 받지 않냐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언제 방문하겠으니 그땐 꼭 집에 있어달라고 했다. 장기간 멀리 출장이라도 다녀오면 엘리베이터도 없는 꼭대기층 우리 집을 몇 번이고 방문한 그의 흔적(“부재중이셔서 점검을 못했습니다”)만이 노란 딱지로 나부꼈다.

점검률 97% 못 넘기면 월급 깎여



올봄, 원룸에서 업무를 보던 점검원이 감금된 채 성폭력당할 뻔했다. 치료는커녕 마음을 누를 새도 없이 업무에 복귀했지만, 다시 팬티만 입은 남자가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언니들 나 정말 힘들었어요”라는 메시지를 단체대화방에 남긴 채 자살을 시도했다. 기사를 읽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대문 밖에서 “가스 점검하러 왔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리면 망설이곤 했다. 여자 목소리로 문을 열게 하고 뒤에서 기습해 들어오는 남자도 있다던데…. 그렇게 내 안전만 걱정했지, 벨을 누른 뒤 고객의 집인 자신의 일터로 들어가기까지 그가 쓸어내려야 했을 가슴과 숨 고르기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월 1200건의 가스를 점검해야 하는데, 점검률이 97%를 넘기지 못하면 1%당 임금이 5만원씩 깎였단다. 그동안 내가 못(안) 받은 전화는 몇 건이었을까.

업계 2위 가스회사의 울산 지역 점검원들은 회사에 수차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리고 서로의 안위를 살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2인 1조를 요구했지만, 회사는 피해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파업에 돌입했다. 넉 달이 넘어가도록 달라지는 게 없어 그들은 시의회 옥상에 올랐다. 그들에게 왜 옥상에 올랐느냐고 물으면 옥상이 단지 ‘거기 있어’ 올랐다 하겠는가. 타워크레인에 오르는 건설노동자도, 고속도로 요금소 지붕에 오르는 요금수납 노동자도 그런 이유로 높은 곳에 오르는 이는 없다. 옥상에서 경찰에 연행되면서는 “형사님들도 2인 1조 하시잖아요. 우리도 그거 해주세요”라고 외쳤다 하니, 그들은 ‘살려고’ 아찔한 곳에 올랐을 것이다. 더는 ‘아무도 아닌 것’으로 취급당하지 않으려고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두 사람씩 한 집에 들어가려면 가스요금을 올려야 하고, 모든 고객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일이라 안 된다고 했다. 고객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할 수 없어 2인 1조로 편성할 수 없다는 가스회사의 훌륭한 주장이 사실이려면 ‘모든 가스점검원은 언제든 안전을 위협당할 수 있어’라는 대구도 함께 딸려나와야 하지 않나.

이 가스회사의 지난해 수익은 340억원인데 2인 1조 편성에는 20억원이 더 든다고 한다. 소비자 불매 운동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사는 터라, 회사는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선택적’ 2인 1조, 건수 성과제 폐지,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 마련 같은 안전 대책에는 지난 9월20일 일단 합의했다. 그러나 이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정책에도 불구하고, 가스점검원들은 민간사업자 위탁업체 소속이라는 이유로 정규직 논의 탁자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실정이다.

우리는 무수한 그와 2인 1조



물이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스위치를 눌러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가스가 새는 것 같다….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작동을 멈추면 그제야 안다. 타인의 노동 없이는 하루도 영위할 수 없는 게 우리 삶임을. 생활 필수제를 일상적으로 누릴 권리는 노동자의 안정과 안전 보장과 맞물려 있다. 무수한 ‘그’와 나도 2인 1조란 말씀.

김민아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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