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0년 전 전쟁병기→로마 사냥축제 산제물→상아 밀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호랑이와 사자랑 싸우면 누가 이겨?”
아이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난 이렇게 대답한다. “애초에 싸움을 할 수가 없어. 둘은 사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지.”
그러면 서로 다른 두 종의 코끼리끼리 싸움을 붙여보면 어떨까? 코끼리는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 사는 아프리카코끼리와 인도와 인도차이나반도에 사는 아시아코끼리(인도코끼리)가 있다. 우리가 익히 배웠듯, 아프리카코끼리는 덩치가 크고, 아시아코끼리는 작다. 두 코끼리도 역시 서식지가 달라 현실에서 만나기 어렵다. 그런데 두 코끼리가 만나 피 튀기는 싸움을 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벌어진 라피아 전투에서다.
기원전 인간 전쟁에서 ‘코끼리 혈투’
다른 대륙의 두 코끼리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알려면 약간의 역사 공부가 필요하다.
코끼리가 서구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알렉산더대왕이 동방 원정을 하면서다. 힌두쿠시산맥을 넘은 알렉산더대왕은 인도 북부 펀자브 지역에서 포루스왕과 만났다. 그는 인더스강의 지류인 히다스페스강 전투에서 갑옷을 입은 코끼리 200마리와 혈전을 벌였다. 이후 자신의 부대에도 전투코끼리를 도입해 양성한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대왕이 죽고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집트 왕국)와 셀레우코스 왕조(시리아 왕국)로 갈라진다.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등 지중해 동쪽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지리적 이점으로 비교적 쉽게 전투코끼리를 인도에서 데려왔지만,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등 지중해 서쪽에 자리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 프톨레마이오스는 멀지 않은 곳에 야생 코끼리가 있음을 떠올린다. 아틀라스산맥 이북의 평원과 숲 그리고 에티오피아 등에 사는 작은 야생 코끼리를 전투용으로 길들여 쓰면 됐던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는 강력한 라이벌로 여섯 차례 전쟁을 벌인다. 시리아전쟁이라는 이 전쟁은 ‘코끼리의 전쟁’이었다.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직접 양성한 아프리카코끼리 부대와 셀레우코스의 인도코끼리 부대가 맞붙었다. 다른 두 종의 싸움이었다.
코끼리 부대는 전투에서 상대편 진용의 날개를 부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마치 현대전의 전차처럼 위협적으로 치고 들어가 적군 대열을 흩뜨리는 것이다. 왼쪽 날개를 치고 선공하면 상대방이 오른쪽 날개를 뚫고 반격하는 식으로, 말을 탄 기병과 코끼리 부대 그리고 보병은 마치 학춤을 추듯 다양한 전술로 움직였다. 코끼리의 무기는 억센 코와 날카로운 엄니(상아)였다. 코끼리는 엄니로 상대편 코끼리의 엄니를 걸어 물고 늘어진 뒤 무너뜨렸다. 코로는 상대편 병사를 때리고 잡아 내동댕이쳤다. 마치 럭비 선수들이 어깨를 겯고 싸우는 것처럼 몸으로 밀고 버티었다.
인도종에 압도당한 북아프리카종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들이 야생에서 잡아 훈련한 코끼리 75마리를 출정시켰고, 셀레우코스는 인도에서 가져온 전투코끼리 201마리를 출정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 코끼리는 셀레우코스 코끼리에 수적으로도, 힘으로도 당해내지 못했다. 전쟁 경험이 적은 아프리카코끼리들은 겁을 집어먹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이렇게 전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코끼리들은 인도코끼리의 우렁찬 소리와 냄새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내가 추정하기엔 거대한 크기와 힘에 압도되어 도망쳤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코끼리들이 몸집이 작아 전투에서 공헌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이상하다. 아프리카코끼리가 아시아코끼리보다 몸집이 작다고? 지금의 생물학적 상식과 배치된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길들인 코끼리는 지금의 ‘아프리카코끼리’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코끼리들은 당시 북아프리카와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서식했다. 발바닥에서 어깨까지 키가 2.5m도 되지 않는 소형 코끼리였다.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이 코끼리는 현재 서아프리카 카메룬과 콩고분지 등에서 소수 서식하는 둥근귀코끼리의 아종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라피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들이 스스로 개발한 ‘자체 병기’ 북아프리카코끼리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니, 코끼리에게는 행운이었다. 그 사건으로 이 나라의 ‘전투코끼리 개발’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제2차 포에니전쟁을 일으킨 것을 끝으로 전투코끼리는 점차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뒤이어 번성한 로마제국에서는 다른 용도로 쓰였다. 로마제국의 도처에 있는 원형경기장이 바로 그 무대였다. 전쟁터를 벗어난 코끼리는 이 새로운 무대에서 관중의 열광 속에 검투사와 싸웠고, 사자와 싸웠고, 결박된 죄수를 발로 밟아 죽여야만 했다. 원형경기장에서 코끼리는 사자 다음으로 인기 많은 동물이었다.
기원전 55년, 로마 집정관 폼페이우스가 개최한 축제는 가장 시끄럽고 비릿한 사냥터였다. 이미 사자 600마리를 해치운 뒤였다. 피 냄새 가득한 살육전의 다음 대상은 코끼리였다. 코끼리 20여 마리가 경기장으로 불려나왔다. 북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코끼리들이 맞서 싸울 상대는 역시 같은 고향에서 노예가 되어 온 게툴리족이었다.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창을 던졌다. 코끼리들은 거대한 몸을 움직여봤지만 쏟아지는 투창을 피하지 못했다. 한 코끼리가 격렬하게 저항했다. 기진맥진해 무릎으로 땅을 기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긴 코로 전사의 방패를 빼앗아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판세가 바뀌자 경기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어서 그때까지 살아남은 코끼리들은 탈출하려고 관중석과 경기장을 막아놓은 철제 울타리를 몸으로 쳐댔다. 결국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은 코끼리들은 구석으로 내몰려 코를 휘두르며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로마 시민들은 어느새 코끼리 편이 되어 있었다. “야만적인 싸움을 중단하라!” 야만을 즐기러 왔던 관중은 이 경기의 주최자인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소리쳤다.
전투 병기에서 볼거리로
북아프리카코끼리는 야생에서 점점 사라졌다.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산제물로 고향에서 포획됐고 멸종 직전까지 다다랐다. 왕족과 귀족의 액세서리, 사원과 궁전의 건축용으로 쓰이는 상아를 공급하기 위해 남획된 것도 멸종을 부추겼다. 플리니우스는 서기 77년 이렇게 말한다. “풍족했던 상아는 이제 인도에서 온 것 말고는 보기 힘들어졌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상아가 고갈됐다.” 로마제국은 5세기까지 북아프리카를 점령했다. 북아프리카코끼리는 그 사이 멸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아프리카코끼리는 신비로운 생김새를 지녔다. 동그란 귀, 고매한 품새의 작은 동물이다. 죽어서 잡히면 상아로 로마에 갔고, 살아서 잡히면 산 몸으로 투창에 찔려 죽었다. 종을 착취하고 멸종시키는 문명의 추악함은 2천여 년 전에도 있었다.
남종영 <한겨레> 기자 fandg@hani.co.kr
<한겨레21>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한겨레21>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후원 하기]
[▶정기구독 신청]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