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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김기천 칼럼] 한국 경제의 '일본화'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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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민간 싱크탱크인 니어(NEAR) 재단은 최근 ‘한국형 장기불황 가능성과 위기관리대책’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어두운 터널 속의 한국경제, 탈출구는 없는가’라는 주제의 특별좌담회를 개최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일본 사례로 본 저성장의 의미’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들 행사와 보고서는 모두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 주목했다. 1990년대 초반 거품 붕괴와 함께 디플레이션과 장기 저성장의 수렁에 빠져든 일본과 비슷한 상황이 한국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보다 더 심각한 장기 침체를 겪을 수 있다"거나 "이미 일본식 장기 침체에 진입했다"는 진단까지 나왔다.

한국이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는 우려, 다시 말해 ‘일본화(Japanification)의 공포’는 이번에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일본형 장기 불황’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급속한 고령화와 부동산 거품, 잠재성장률 하락 등이 주된 근거였다. 최근에는 사상 첫 마이너스 물가 기록이 일본화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한국도 잃어버린 20년을 겪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한 두개 유사점을 크게 부각시켜 과장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양치기 소년’ 취급을 받기도 한다. 현대경제연구원도 보고서 결론에서 ‘일본 경제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하지만 ‘정책 실기형 장기불황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을 덧붙였다.

일본처럼 되느냐 아니냐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에 위기가 닥치더라도 진행과정과 양상은 일본과 상당히 다를 것이다. 일본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제한적이다. 그렇다 해도 한국 경제의 미래, L자형 장기 침체에 대한 불안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J의 공포’는 실재하는 위험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올해 성장률 2.2% 달성이 녹록치 않다"고 했다. "우리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주장이 무색하게 현실은 온통 잿빛이다. 내년 전망도 불투명하다. 정부는 "올 하반기 또는 내년에는 회복세가 나타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하지만 내년 성장률이 1%대로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는 기관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선 무역전쟁과 환율전쟁 등 대외 여건이 심상치 않다. 미·중 패권경쟁의 불확실성에 더해 미국과 EU(유럽연합) 사이에도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자유와 개방, 세계화의 질서가 무너지고 보호주의와 각자도생의 퇴행적 무질서와 혼돈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특히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올들어 7월까지 한국의 누적 수출액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8.9% 줄었다. 세계 10대 수출국 가운데 가장 많이 감소했다. 중국은 0.59% 증가했고, 미국은 0.9% 감소에 그쳤다. 무역전쟁의 당사국들보다 한국이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양상이다. 반(反)세계화 기류가 확산되고 장기화하면 한국 경제 전망이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대내적으로는 정부 정책 방향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우려가 크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없다. 누군가는 불만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 과거 정부는 주로 엉성하거나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책 일관성과 추진력, 우선순위와 적절성 등을 둘러싼 다양한 논란이 있었지만 특히 "왜 이 정도밖에 못하느냐"는 지적이 많았다.

지금은 "대체 이러는 이유와 근거가 뭐냐"는 원성이 압도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 동안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만 골라서 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역주행을 해왔다. 최저임금을 2년간 30%나 올리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밀어붙이고, 근로시간을 급격하게 단축하고, 법인세율을 인상하는 등 친노동·반기업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애초 방향을 잘못 잡고, 거꾸로 가고 있으니 이런저런 문제 제기를 해봐야 별 의미가 없다. "좀더 잘해보라"는 주문(注文)은 되레 상황을 악화시키는 주문(呪文)이 될 수 있다. 정책 방향을 완전히 틀지 않는 한 잘해야 ‘땜질’ 처방으로 시간을 버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절대 노선 전환은 없다"며 완강한 입장이다.

최근 한·일 경제갈등을 계기로 기업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여당 의원들이 전경련을 찾아가 정책 간담회를 열고는 다음 날 곧바로 노동계에 "정식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대형 유통점 규제를 비롯해 기업을 옥죄고 압박하는 정책들을 줄줄이 내놓는 것도 예전 그대로다. 경제계는 "아무리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다"며 체념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정책 실기의 위험에 대한 현대경제연구원의 지적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연구원은 ‘지금과 같이 경기회복력이 약화된 상황에서는 단기 경기 대응 과정에서의 정책 실기가 장기 침체를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정부 정책 결정은 객관적으로 신뢰할 만한 증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국민적 신뢰감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고도 했다.

쉽게 말해 신뢰할 만한 근거가 없는 정부 정책으로 인해 한국 경제의 일본화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심스레 에둘러 말했지만 민간경제연구소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위의 경고를 했다. ‘홍위병의 세상’에서는 경제전문가들이 이 정도 고언(苦言)을 내놓기도 쉽지 않다. 다만 정부·여당이 새겨들어야 의미가 있을 텐데 솔직히 기대난망이다.

조선비즈 논설주간(kck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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