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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영화 리뷰] 조커, "삶은 비극 아닌 코미디…" 깨닫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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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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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커가 돌아왔다.

1989년작 '배트맨'의 잭 니컬슨, 2008년작 '다크나이트'의 고(故) 히스 레저, 2016년작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재러드 레토에 이어 머리칼을 진녹색으로 물들인 주인공은 호아킨 피닉스다. 다음달 2일 한국 관객과 처음으로 만나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신작 '조커(JOKER)'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8분간 기립박수를 받고 결국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며 기념비적 영화의 출현을 예고했다. '선의는 어느 순간 악의로 돌변하는가.' 이 질문 하나에 답하는 영화를 26일 열린 시사회에서 미리 엿봤다.

자, 조커가 '되어가는' 남성 이야기다. 청소업체 파업으로 골목마다 '슈퍼 쥐'가 들끓는 1980년대 초 고담시, 어릿광대로 분한 아서 플렉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며 그래피티 가득한 기차를 타고 행사를 뛰어 연명한다. 아서가 헌신하는 모친 페니 플렉은 30년 전 가정부로 일한 인연을 핑계 삼아 시장직에 출마한 토머스 웨인에게 편지를 보내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느닷없이 웃는' 질환을 가진 아서에게 세계는 무례하게 접근한다. 뜨내기들은 아서의 광고판을 빼앗고, 두들겨 맞고 돌아온 아서에게 사장은 "광고판 값을 월급에서 빼겠다"며 모욕한다. '자존감 부재'를 호소하는 우울한 아서에게 사회복지사는 "당신 같은 사람에겐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라고 냉대하고, 꼬마를 즐겁게 해주려던 선의의 대가는 경멸뿐이다. 고담에는 공감이나 연민이 사라졌다.

"갈수록 세상이 미쳐가는 것 같아요." 애써 세계의 일원을 자처하며 인간을 이해하려던 아서는 자존에 구둣발을 내리꽂는 취객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자기만의 비밀 하나를 품는다. 불결하고 불온한 화장실에서 '온전히 나를 표현했다는 듯이' 춤을 추며 그는 선의의 가면을 벗기로 한다. 심연의 뭔가가 '툭' 끊어지자 광기가 살갗을 뚫는다.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개 같은 코미디였어." 아서의 고백이다.

악인으로 변신하는 한 남성의 개인적 서사에 머무르지 않기에 이 영화는 위대하게 도약한다. 세계의 불평등 코드를 추출해내며 카오스를 만들어서다. 스포일러이므로 숨길 수밖에 없으나 아서가 쏜 몇 발의 총성은 '사회적 죽음'으로 포장되고, 아서는 영웅이 된다. 억눌린 악은 어릿광대 가면을 쓴 고담시민에 의해 '몸'을 얻는다. 고담은 불에 타고, 아서는 입 안의 피로 웃는 입을 만들어 조커가 된다.

'조커(JOKER)'의 어원과 함의가 희대의 악마 캐릭터 조커를 다룬 전작과 상이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조커의 뜻은 네 가지 짝패로 이뤄진 포커의 '엑스트라(Extra) 카드'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 영화에서 조커는 '조크(joke·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선한 농담조차 공감을 일으키지 못할 때 소통 가능성은 차단된다. 아서의 부탁은 그래서 소름끼친다. "날 조커로 불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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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의도가 단절된 사회에서 아서는 연민과 공감이 부재하는 사회의 가해자가 되기로 한다. 벌거벗겨진 타자로 내몰린 '모든 아서'의 선택이 반드시 조커를 닮을 필요는 없겠다. 다만 세상을 뒤집는 조커의 악의는 결국 존재감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세상에서 배제된 선인(善人)들 사이에서 태어나고야 말았음은 진정 의미심장하다. 고담은 슬픈 악인 조커를 잉태한 거대한 자궁인 셈이다.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반전과 반전이 곳곳에 숨겨졌다. 반전의 코드는 '배제된 자'로서의 아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인 줄 알았던 서사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돌변하더니, 결국엔 아예 아서를 콤플렉스조차 사치인 소외자로 다시 역전시킨다. 못내 진실을 알고 싶어하던 아서가 발견하고야 마는 단 하나의 진실은, 진실의 내부에 진입할수록 위험하다는 진실뿐이겠다.

아서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는 사과 한 알로 하루를 버티며 23㎏을 감량했단다. "아서 캐릭터는 굶주려 있고 건강하지 않고 영양실조 상태의 늑대처럼 보이길 바랐다"고 피닉스는 후일담을 털어놨다. '어깨가 곧 날개'라는 은유를 전제 삼는다면, 뜨내기들의 폭행에 피멍이 든 아서의 어깨뼈는 날개가 잘려나간 소시민의 상징이기도 하다. '뼈로 말하는' 피닉스의 동작은 숭고할 지경이다.

아쉬움도 남는다. 영웅과 악당의 혈투라는 이분법을 돌파하고 조커의 악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유를 건넨 영화 '다크나이트'는 개봉 11년이 지나도록 어떤 텍스트(text)의 위치를 점유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조커가 가진 악의의 불가피성을 지지하려 '권력을 향한 야망 가득한 거부'란 이분법에 토머스 웨인을 가둬버렸다. 불평등 담론으로 나아가려던 이유 탓이었겠지만, 도식이 피상적이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물론 사막의 바늘 크기만 한 단점에 불과해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땐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기 어려울 만큼 전율이 온다. 분명히 웃고 있지만 우는 듯한 아서의 표정이 가진 의미와 분명히 올라가고 있지만 내려가는 듯한 아서의 계단에 담긴 의미는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주제다. 천국의 객석에 앉은 히스 레저도 기립 박수를 칠 영화라면 과언일까. 우리 안의 '조커'를 발견하는 영화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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