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의 경기 침체(Recession)에 대한 공포감이 심상치 않다. 지난 8월 14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다우존스 30 산업평균지수는 전날보다 3.05% 급락한 2만5479.42에 마쳤다. 올 들어 가장 큰 낙폭이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와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 역시 전일 대비 3%대 하락을 기록했다.
주식시장이 출렁인 주원인은 미 국고채의 장단기 금리 역전이었다. 같은 날 채권시장의 ‘벤치마크’인 10년물 금리(수익률)는 장중 1.619%까지 떨어져 통화정책에 민감한 2년물 금리(1.628%)를 하회한 것이다. 2년물 금리가 10년물 수익률을 앞선 것은 2007년 6월 이후 약 12년 만이다. 미국은 장단기 금리 역전 이후 일 년 뒤 세계 4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국고채 장단기 금리역전이 경기침체의 신호이자 블랙스완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는 세계를 뒤덮고 있다. 지난달 싱가포르와 호주 등 아시아로 금리 역전 흐름이 번지고 국내 채권시장에서도 국고채 3년물과 10년물의 금리차가 11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싱가포르 2년물과 10년물 간 금리 차는 지난 8월 14일 1bp까지 좁혀졌다. 이는 2006년 11월 이후 최소치다. 호주 역시 3년물과 10년물 금리 움직임(수익률 곡선)이 완만해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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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 등장에 ‘10년 주기설’ 솔솔
장단기 채권 금리역전이란 블랙스완의 등장으로 세계경제가 10년마다 위기가 찾아온다는 ‘10년 주기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는 미국 경기가 부침을 겪는 가운데 기준금리 인하와 인상의 순환이 신흥국 환율을 흔들고, 글로벌 자금의 이동이 일어나면서 경제 펀더멘털이 취약한 나라가 위기를 맞는 사이클이 대략 10년 단위로 되풀이된다는 일종의 경험이자 속설이다.
10년 주기설에 장단을 맞추듯 트럼프 미 대통령도 주가폭락의 원인을 금리에서 찾았다. 트럼프는 지난 8월 14일 트위터를 통해 “정신 나간(Crazy) (국고채 장단기) 수익률 곡선 역전”이라며 “우리는 쉽게 큰 성과를 이룰 수 있는데 연준이 다리를 잡고 있다”고 연방준비제도(Fed) 때리기에 나서기도 했다. 제때 금리인하를 단행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미중 무역전쟁으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진 미 경기회복을 위한 추가금리인하를 예상하고 있다.
사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정책금리를 0%까지 인하하고 비전통적 통화정책인 양적완화를 시행해 왔다. 이러한 선진국들의 저금리 확장정책은 한국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영익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그의 저서인 <위험한 미래>에서 “글로벌 환율전쟁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라며 “이때 한국의 원화가치는 엔화에 비해 39%, 유로화에 비해서 36%나 상승했고, 중국 위안화 대비 4% 상승했다”고 분석했다.
덧붙여 그는 “한국의 주요 상품은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데 엔화에 비해 원화가치가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한국의 수출경쟁력을 떨어뜨렸다”고 했다.
지난 8월 13일 달러당 원화 환율은 1222.20원을 기록했다. 3년 5개월 만에 최고치였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경쟁력이 하락하는 것은 물론 외국인들은 가치가 떨어지는 원화를 팔고, 달러로 이탈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흐름이 계속되면 외환 보유고가 고갈될 수 있다. IMF와 외환위기 모두 같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다시 달러를 국내로 들이고자 금리를 올리면 부동산이 폭락하고, 대출자들은 파산할 위험성이 높아진다. 다행히 1220원을 넘기며 고공 행진하던 원·달러 환율은 최근 1180원대(9월 16일 기준)로 다시 내려앉았지만 전문가들은 환율전쟁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금리 및 통화정책에 한계가 있는 만큼 경기 침체가 오면 각국 정책당국은 자국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늘리는 정책을 펼치려 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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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키코 사태 다시 오나
리먼식 위기 다시 올 가능성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방아쇠를 당긴 것은 파생상품이었다. 2007년 장외거래 파생상품 중 CDS(신용부도스왑)는 거래규모만 약 62조달러로 그 무렵 세계 GDP 총액 54조달러보다도 많았다. 이 상품은 장외에서 거래되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한테 얼마나 팔았는지 알 수 없어 금융기관 간의 불신으로 돈거래가 막혔다. 곧 신용경색이 일어나 자금 순환에 문제가 생긴 게 금융위기의 첫 단계였다.
과잉유동성 역시 금융위기의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1907년 공황의 원인으로 꼽히는 ‘과잉자본’, 1929년 대공황 원인은 과도한 ‘통화팽창’정책이라 불렸다. 1907년, 1929년, 2008년 공황을 관통하는 공통의 키워드는 결국 과잉유동성으로 이는 필히 시장의 거품을 일으킨다.
무섭게 오르던 미국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리먼의 파산이 가져온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한국경제에 치명상을 입혔다. 주식시장은 반토막 났고, 환율은 수직상승했다. 수렁에 빠져든 2009년 경제성장률은 0.7%에 그쳤다. 당시 한국기업들을 울린 것도 파생상품이었다. 약 730여 개 중소 수출기업을 단숨에 파산 위기로 내몬 외환파생상품은 바로 ‘키코(KIKO: Knock In Knock Out)’다. 환율 변동위험 회피(헤지)를 목적으로 한 이 계약은 원·달러 환율의 예상 변동 범위를 설정한 뒤 미래 환전금액을 확정하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환율이 계약 이후 6개월간 달러당 900~1000원 범위에서 움직이면 1달러를 950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이 계약의 이면에 잠들어 있던 파괴적인 조항을 깨우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안전자산 선호 심리로 환율이 폭등(달러가치 상승)하면서 ‘환율이 범위 상단(1000원)을 한 차례만 돌파(knock in)해도 계약한 달러의 두 배 이상을 약정환율(950원)로 환전해야 한다’는 독소조항이 발동됐기 때문이다. 2008년 봄부터 상승세로 방향을 튼 환율은 리먼 파산 직후인 2008년 9월 16일 하루에만 1160원으로 51원 뛰어올랐다. 환율은 그해 11월 24일 1513원까지 치솟으며 총 3조원대 키코 관련 손실과 300여 개 기업의 파산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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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파산은 국내 은행들의 위기로 이어졌다. 해외 은행들이 각종 외환파생상품 계약을 유지하려면 달러 담보를 더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당시 국내 은행의 단기 외화채무 잔액은 2008년 9월 말 1600억달러(약 176조원)로 불어나 있었다. 2004년(440억달러) 대비 네 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였다. 해외은행들은 환율 폭등으로 각종 계약의 원화담보(채권·예치금 등) 가치가 최소유지한도 밑으로 떨어지자 예치금을 달러로 지급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1997년 해외 은행들의 급속한 채권 회수 트라우마로 잔뜩 움츠러든 국내 은행들은 곧바로 대출 심사를 강화하며 자금줄을 죄기 시작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국내 4대 시중은행 신용등급을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지정한 1997년 10월 16일. 코스피지수는 사상 최대인 126포인트(9.4%) 폭락하며 제2의 외환위기 공포를 키웠다. 키코 손실과 달러 유동성 압박, 대기업 대출의 부실화 등 대형 악재가 쏟아져 금융시스템을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시장을 지배했다. 대기업들의 주가가 무더기 하한가로 추락했다.
최근에는 제2의 키코사태로 불리는 선진국 금리를 매개로 한 파생결합펀드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독일 등 주요 선진국 금리를 매개로 한 파생결합 펀드(DLF, Derivatives Linked Fund) 만기가 임박하면서 주요 선진국의 금리가 예측과 달리 떨어지는 바람에 8000억원 규모의 상품에 문제가 발생했다. 금리가 예상치를 벗어나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바람에 투자자들은 수익은커녕 원금도 까먹을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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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생상품 위험 도처에… 위기 극복할 금융체력 충분한가
DLF는 파생결합증권(DLS, Derivatives Linked Securities)과 연계해 은행에서 펀드 형태로 판매하는 상품으로 주로 우리은행과 KEB하나은행에서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양사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팔기 힘든 상품을 특정 투자자에게 사모형태로 판매해 투자금액 단위도 크다. 독일 금리 연계 DLS도 최소 가입 금액이 1억원 이상이며 8224억원이나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문제는 독일, 영국, 미국의 채권 금리 등을 기초자산으로 한 DLF가 해당 국가들의 장단기 금리 차가 역전되면서 손실이 불가피해졌다는 점이다. 제2의 키코 사태와 같은 피해가 현실화됐다. 키코상품 투자 피해가 주로 기업이었다면 이번 DLF는 고령 고객을 포함한 일반 투자자가 많다는 점만 다를 뿐 피해양상은 비슷하다. 이 중 대부분이 손실구간에 진입한 상태로, 만기까지 현재 금리 수준이 이어지면 총 손실률이 56.2%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는 지난해에만 20% 급증한 ‘저신용 기업부채’(레버리지론)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레버리지론은 투기등급 이하(에스엔피 및 피치 기준 BB+ 이하)의 저신용 기업에 제공되는 고위험 대출채권으로, 2010년 5000억달러 규모에서 지난해 1조3000억달러 이상으로 두 배 넘게 성장했다. 지난 7일(현지시각)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기업부채의 증가율은 지난 10년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앞지르고 있고 (신용등급이 낮은) 가장 위험한 기업들의 부채 증가가 집중돼 왔다”며 “부채 수준이 커서 경기 침체 국면이 오면 기업들이 취약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준 보고서를 보면, 레버리지론은 지난해에만 20.1% 증가했다. 1997~2018년 연평균 증가율인 15.8%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진국의 재정확장정책으로 거품이 걷히는 과정에서 경기 침체로 인해 여러 파생상품들이 뇌관으로 작동할 가능성은 커졌지만 과거처럼 금융위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유는 1997년이나 2008년 위기를 거치며 얻은 학습효과다. 올해 상반기 말 기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4030억7000만달러다. 지난해 2분기 4000억달러대로 접어든 이후 줄곧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단기외채 비중도 적다. 올해 3월 말 기준 준비자산 대비 단기외채의 비중은 31.9%다. 지난 2014년 3분기부터 35%대를 하회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35% 아래 수준의 단기외채 비중은 양호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여러 지표들을 종합적으로 따지자면 외부의 요인에 의해 외환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외환보유액이 충분한 데다 스위스, 캐나다, 중국, 아랍에미리트, 호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주요국과 통화 스와프 계약을 맺고 있어 유사시 대응도 가능하다. 과거처럼 특정 국가의 투자자들이 긴급히 채권 회수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우리 금융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만큼 위기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현재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윤석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9월 4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최근 실물경제의 부진과 금융시장 변동 속에서도 축적된 외환보유액과 낮은 단기외채 비중 등 튼튼한 금융산업 건전성 지표 등 덕분에 금융부문은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며 “더 나아가 금융이 실물 회복을 지원하는 본연의 자금 중개기능에 더욱 충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9호 (2019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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