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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우지경의 여행 한 잔] `영혼의 약국`을 찾으신다면 스위스 생갈렌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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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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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천국이 정원이 아니라 도서관이라고 생각했어요."

입구에 그리스어로 '영혼의 약국'이라고 쓰인 현판을 내건 스위스 생갈렌 대성당 도서관 앞에서 소설가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렸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천국의 입구에 서 있는 걸까. 몹시 귀찮지만 소지품을 사물함에 맡기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뒤 들어선 도서관은 내가 상상한 낙원보다 아름다웠다. 여기가 천국이라면 고통과 슬픔 따윈 느낄 틈조차 없겠다 싶을 만큼. 스위스의 동쪽 끝자락, 콘스탄스 호숫가의 소도시 생갈렌은 612년 아일랜드 수도사 생 갈루스에 의해 형성된 도시다. 게다가 8세기에 지어진 수도원과 부속 도서관 그리고 구시가까지 중세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꼽히는 생갈렌 대성당 부속 도서관이다.

누구나 영혼의 약국에 발을 들이는 순간,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도서관에 압도되고 만다.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화,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난간, 2층 높이의 서가를 가득 채운 17만권의 장서 앞에서 감탄 말고는 달리 할 일을 못 찾게 되는 거다. 나 역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도 전에 수도사들이 한 자 한 자 손으로 필사한 책이라 생각하니 더욱 감동적이었다. 문제는 이 감동을 (사진 촬영이 금지라) 카메라에 담을 수도 없고, 전율이 이는 손으로 책을 만져 볼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찾은 곳은 나즈(NAZ·National zum Goldenen Leuen)란 이름의 생갈렌 동네 술집이었다. 말이 동네 술집이지 생갈렌 대성당과 부속 도서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나즈는 꽤 유서 깊은 비어 하우스였다.

대표 메뉴는 직접 만든 수제 맥주와 소시지. 중세 수도사들의 손 글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손수 만든 소시지의 식감은 허전했던 마음이 꽉 채워해 질만큼 탱글탱글했다. 오동통한 소시지에 특제 소스를 콕 찍어 맥주 한 모금 하고 나니 천국이 뭐 별건가 싶어졌다.

내친김에 나즈의 시그니처 러시안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주문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강력한 맛의 진한 흑맥주였다. 흑맥주를 홀짝이다 보니 독일 종교개혁에 앞장선 마틴 루터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맛있는 맥주를 마시면 잠을 잘 자고, 잠자는 동안은 죄를 짓지 않으니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때 결심했다. 죽기 전에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천국보다 아름다운 도서관을 찾아가리라고. 그렇게 계속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죄를 짓지 않고 살다 보면 보르헤스가 꿈꾸던 도서관 같은 천국에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지경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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