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겨를] ‘모뽀’ ‘모껄’ 100년 전에도 신조어… 10개 중 7개는 소멸한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신조어 법칙
한국일보

[겨를] ‘인싸’와 ‘아싸’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신조어, 하지만 집단의 결속감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반대로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류효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말.’ 신조어의 사전적 정의는 간단하지만, 신조어를 대하는 속내는 다양하고도, 복잡하다. 표준어와 한글의 근간을 흔드는 언어파괴라는 지적부터, 소통 단절을 항변하는 기성세대의 호소까지. 신조어에 반응하지 못하면 자괴감이 들고, 유행하는 신조어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며 세대간 격차를 따라잡으려 고군분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신조어의 탄생과 사용은 언어학적 측면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라고 본다면, 사용의 편의를 위해 도구를 새로 만들거나, 고쳐 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신조어는 어느 시대에나 있다

신조어로 대화하는 신세대를 보며 혀를 차는 기성세대 역시 한때는 신조어 사용으로 당시의 기성세대와 갈등을 겪었을 수 있다. 신조어는 특정 세대만의 현상이 아닌, 모든 시대에 존재했던 언어적 특성이기 때문.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에 전시된 1920년대 사전을 살펴보면 ‘모뽀’와 ‘모껄’이라는 말이 있다. 각각 ‘모던 보이’(Modern boy)와 ‘모던 걸’의 줄임말이다. ‘샐러리맨’ ‘핸드백’ ‘다혈질’ ‘감상’ 등 오늘날 흔히 쓰이고 있는 말들 역시 1922년 출간된 한국 최초의 신조어 사전인 ‘현대신어석의’에 등록된, 당시에는 신조어로 분류됐던 단어들이다. 오늘날 흔히 쓰이는 ‘빽’ ‘전업주부’ ‘신세대’ 같은 단어 역시 각각 1950년대, 60년대, 90년대에 등장했던 신조어들이다.

◇신조어에도 ‘트렌드’가 있다
한국일보

지난해 숙박사이트 야놀자가 만든 신조어 영역 테스트 문제지


‘워라밸’ ‘헬조선’ ‘금수저’처럼, 신조어에는 그 시대의 사회상이나 분위기가 적극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은 신조어 생성 방식에도 적극 개입된다. 매체 환경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2424(이사이사), 8282(빨리빨리)처럼 숫자로 의미를 전달하는 신조어는 90년대 삐삐의 등장으로 생긴 단어들이다. PC통신이 등장하면서부터는 ‘ㄳ(감사)’ ‘ㅋㅋ(큭큭)’ ‘ㅇㅇ(응응)’처럼 한글 자판의 자음이나 초성만을 이용해 대화가 가능하도록 한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2000년대 이후 온라인 게임이나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 되면서 ‘득템’ ‘만렙’ 등 해당 게임과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이 신조어로 자주 등장했다. ‘고나리’(‘관리’의 오타) ‘뭥미’(뭐임’의 오타)처럼 자판 오타에서 생성된 신조어부터 ‘댕댕이’(멍멍이) ‘커엽다’(귀엽다)’처럼 한글 기표의 유사성을 이용한 이른바 ‘야민정음’도 최근의 신조어 경향 중 하나다

◇신조어 70%는 10년 안에 자연 소멸

새롭게 탄생했다고 해서 모든 신조어가 꾸준한 생명력을 얻는 것은 아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2005년~2006년 사용됐던 신조어 938개 중 10년 뒤인 2015년까지 총 20회 이상, 연평균 1회 이상 매체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단어는 250개(26.6%)에 불과했다. 신조어 10개 중 7개는 10년 안에 소멸한 것이다. 신조어가 특정 집단에서만,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단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자격이 필요하다. 전 국립국어원장이자 한글학회장인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는 “특정 집단에만 속해있지 않고, 일반인에게 널리 쓰이고, 저항감 없이 널리 쓰일 경우 의사소통 도구로서 성공한 신조어라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사전 등록’까지는 멀고 먼 길… ’아카이빙’에 집중
한국일보

일반인도 아카이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국립국어원의 우리말 사전 '우리말 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자연 소멸하는 신조어의 비율이 높은 만큼, 신조어가 정식 단어로 사전에 등록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가성비’ ‘식감’ 등 오늘날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 역시 사용 연차가 10년도 채 안 된 신조어로, 사전에 정식 등록되지 않은 단어다. 그러나 편찬을 위해서는 종이 사전을 전면 개정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웹 기반으로 사전이 업데이트 되는 오늘날에는 개정보다는 아카이빙 기능에 집중한다. 국립국어원이 2016년 정식 출범한 ‘우리말샘’은 ‘위키피디아’ 형식의 개방형 국어사전이다. 누구나 뜻풀이, 발음, 방언, 용례 등 어휘 정보를 올리거나 기존 정보를 수정할 수 있다. 이유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는 “특정 계급이나 성별을 비하하거나, 일부 집단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게재할 수 있도록 한다”며 “2016년 출범 이후 2만 여건의 단어 정보가 등록, 수정됐다”고 전했다.

◇신조어 출현 자연스럽지만 공식 사용은 신중해야
한국일보

2017년 tvN 프로그램 'SNL'은 10대들의 은어인 '급식체'를 주제로 한 '설혁수의 급식체 특강' 코너를 선보였다. tvN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조어의 출현은 막을 수 없지만, 이로 인한 갈등과 문제점 역시 불가피하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2017년 20~40대 직장인 85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에 따르면 89.2%의 직장인이 ‘신조어 때문에 세대 차이를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고, ‘신조어 뜻을 이해하지 못해 검색해봤다’고 답한 20대도 96%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초래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권 교수는 “신(조)어는 정확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고정적 의미 확정이 안 된 단어이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미디어나 보고서 등 공식적인 매체와 자료에서 사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된다”고 말했다.

◇너도나도 신조어 배우기
한국일보

전남 광양 백운고는 급식체사전을 발간해 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황왕용 사서교사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단어 인정 여부나 공식적 사용 빈도와는 별개로, 신조어는 소통의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언어 형식이다. 최근에는 일선 학교나 한국어 강의 현장에서도 신조어를 배우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건국대는 지난해 4월 재학생들이 직접 한중일 각국의 유행어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3시간짜리 강좌를 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한국 신조어 테스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전남 광양 백운고의 사서교사인 황왕용씨는 최근 1학년 학생들과 ‘급식체’(10대 청소년들이 쓰는 용어)를 소재로 수업한 내용을 토대로 책 ‘급식체 사전’을 냈다. ‘개이득’ ‘에바참치’ ‘띵곡’ 등 10대 청소년들이 자주 쓰는 단어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10대들의 생각을 분석한다. 황씨는 “급식체는 언어로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 또래의 문화가 담겨있다”며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라도 어른들이 급식체라는 언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정해주 인턴기자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