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의 교훈
1939년 9월 1일 나치 폴란드 침공
7300만 희생된 2차대전 비극 시작
폴란드와 군사동맹인 영국·프랑스
선전포고만 하고 ‘가짜전쟁’ 벌여
프랑스가 침공 당하자 비로소 반격
동맹보다 국익 우선의 냉혈 국제관계
공산 소련과 나치 독일 불가침 조약
동맹·군사력에 정보력·대비태세 필수
기만전술 휘말리지 않을 판단력도
군국주의 일본이 이미 1937년 7월 7일 중화민국을 침략해 중일전쟁을 일으켰지만, 일반적으로 폴란드 침공일인 9월 1일을 2차대전 개전 일자로 본다. 군국주의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비로소 2차대전의 한 축을 이뤘다고 여긴다.
나치 독일군 기갑부대가 진격하고 있다. [독일연방문서보관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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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에서 교훈 얻지 못하고 2차대전 발발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불과 20년 남짓 뒤 인류는 또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1차대전은 1657만 명이 숨진 살육극이었다. 이런 희생을 겪고도 인류는 전쟁을 막을 지혜를 얻지 못했다. 2차대전은 그보다 많은 73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 최악의 참극이다.
폴란드 침공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지 불과 1주일 뒤에 발발했다. 협상을 맡았던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년) 외무장관과 독일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893~1946년) 외무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도 부른다. 두 나라는 10년 간 서로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모든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폴란드 침공 직전 이뤄진 나치 독일과 공산 소련 간의 불가침 조약 조인식. 소련 독재자 스탈린(오른쪽에서 둘째)가 미소를 짓고 있다.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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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다른 나치와 소련, 영토 야욕에 손잡아
이념적으로 철천지원수인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 국가사회주의 국가 독일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세계는 충격을 받았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적도, 친구, 이념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두 나라가 불가침 조약과 함께 맺은 비밀의정서가 있다. 독일과 소련이 동유럽 약소국들을 서로 나눠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조약 체결 1주일 뒤인 9월 1일 오전 4시 44분엔 독일이, 9월 17일엔 소련이 각각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토 야욕은 이념적 원수도 손잡게 했다.
1939년 11월 28일 독일과 프랑스 국경 근처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병사가 앉아서 놀이를 하고 있다. '가짜 전쟁'의 한 모습이다.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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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이 공격받아도 팔짱 낀 ‘가짜 전쟁’
주목해야 할 교훈이 있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던 서방 강대국들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선전포고만 했을 뿐 실제 개전은 머뭇거렸다는 사실이다. 폴란드는 유럽의 강대국인 영국·프랑스라는 든든한 동맹국이 있었다. 폴란드는 1939년 5월 29일 프랑스와 군사 협정을 체결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배후에서 독일 방어선인 지크프리트 선을 공격한다는 내용이다.
그해 4월부터 폴란드의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에서 소요 사태가 계속되고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단치히 회랑(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자치하는 단치히 자유시에서 독일 본토로 이어지는 폴란드 영토)’을 요구했다. 폴란드가 프랑스와 군사 협정을 맺은 배경이다. 하지만 이 군사 협정은 양국이 정치 협정을 맺어야 발효하는데 프랑스는 머뭇거리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나흘 째인 9월 4일에야 비로소 이를 체결했다. 적은 강을 건너왔는데 동맹은 바다 건너에 있었다.
폴란드는 영국과도 동맹 관계였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다음 날인 8월 24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폴란드 방위 약속을 지키겠다고 발표했다. 25일에는 폴란드와 또 다른 동맹 조약을 맺었다.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침략을 받거나 독립이 위협받으면 다른 나라는 자동 개입한다’는 적극적인 내용이었다. 오늘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나 한미동맹과 다름없다. 하지만 동맹은 적의 야욕을 누르지도, 공격을 저지하지도 못했다.
체임벌린 총리는 3일 에 즉각 철군을 요구하는 최후통첩 연설을 했지만 독일이 거부하자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도 함께했다. 하지만 그해 9월 폴란드의 동맹국들은 독일에 선전포고만 했을뿐 7개월간 '복지부동'이었다. 역사는 이를 ‘가짜 전쟁(Phoney War)’으로 부른다. 윈스턴 처칠은 ‘여명 전쟁(Twilight War)’으로, 프랑스 언론은 '기묘한 전쟁(Drôle de guerre)'으로 불렀다. 영국 언론은 ‘전격전(Blitzkrieg)’이라는 독일어 단어를 살짝 비틀어 ‘앉아서 하는 전쟁(Sitzkrieg)’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인 서부전선은 평화로웠고, 폴란드는 나 홀로 싸워야 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군이 침공하자 폴란드 병사들이 전선으로 나가고 있다.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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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동맹을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아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와 맺은 동맹관계를 믿었던 폴란드는 결국 쓰라린 배신을 당했다. 역사는 이를 ‘서구의 배신’으로 부른다. 아무도 동맹을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선 좌파 평화주의자를 중심으로 ‘왜 단치히를 위해 죽어야 하나?(Pourquoimourir pour Danzig?)’라는 구호가 인기를 끌었다. 동맹국 국민이야 죽건 말건 알 바가 아니라는 자국 중심주의는 좌우가 다르지 않았다. 이는 21세기에 다시 활개친다.
그러는 동안 나치 독일군은 보병과 포병, 그리고 기갑부대, 그리고 공군이 벌이는 합동작전을 통해 놀라운 속도로 진격했다. 전격전이다. 동서 협공을 당한 폴란드는 급속히 무너졌다. 사실 폴란드는 1918년 11월 독립한 뒤 강력한 육군을 건설했다. 폴란드군은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 뒤 내전을 겪고 있던 소련을 1919년 2월 침공해 1921년 3월까지 폴란드-소련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과거 폴란드 왕국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지역을 합병했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 독일군과 소련군이 20일 서로 만나고 있다. 이념적으로 물과 기름 같았던 나치와 공산당은 영토 야욕 앞에 손을 잡았다. [독일연방문서보관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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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중 허를 찔린 소련과는 철천지원수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웃 나라를 원수로 만들면 국가 안보에 득이 될 수 없다. 소련이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폴란드는 복수를 다짐하는 소련과 영토 야심에 가득 찬 나치 독일의 협공을 당하게 됐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바르샤바 시내.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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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외교문서, 힘·지혜·대비태세가 뒷받침
소련도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 군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독일-소련 전쟁의 시작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불리는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될 때까지 소련 지도자 요시프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침략 의도를 믿지 않았다. 수많은 징후가 나타났고 정보가 올라와도 듣지 않았다.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고집불통 지도자가 보여준 오판의 결과는 국민의 희생이었다.
불가침조약은 그야말로 휴짓조각이 됐다. 국가 간 신뢰는 상대의 번복이나 기만 전술을 막을 수 있는 정보력과 판단력, 그리고 대비 태세가 있을 때만 유효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새겨야 할 2차대전의 교훈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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