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루시드폴이 단숨에 빠져든 시인 마종기는 누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42)



중앙일보

자신의 노랫말을 모아 책으로 냈던 가수 루시드폴. 노래의 가사가 참 좋다. [사진 안테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멜로디가 가장 중요하다. 가사는 그다음이다”라고 주장했던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그는 가사만 따로 읽는 음악 팬도 있을 수 있다는 건 미처 몰랐던 듯하다. 루시드폴을 보라. 그는 약 10년 자신의 노랫말을 모아 책으로 낸 바 있다. ‘루시드 폴의 노래는 오디오 없이 가사만 읽고 있어도 좋아요’라는 팬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일 것이다. 나 역시 그의 노랫말을 좋아한다. 하나를 꼽아보라는 주문은 어렵지 않다. 나는 언제나 이 곡을 댄다.

몇만 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보다

맛도 없고 비린지는 몰라도

그래도 나는 안다네

그동안 내가 지켜온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

저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 루시드 폴, 고등어 가사 부분

8집 가수 루시드 폴의 노래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곡 중 하나다. 흔히 볼 수 있는 반찬인 고등어의 입장에서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곡이라며 소개했지만 사실 그가 고른 말들은 평이하고, 어떤 경우에는 유치하기까지 하다. (언제든 동물을 의인화할 때, 이 유치함을 피해가기가 참 힘들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서 뭉클한다. ‘가난한 그대’하고 화자가 청자를 직설적으로 부르는 순간, 그가 고른 ‘가난한’이라는 형용사에 비난이나 젠체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그것에서 오히려 화자와 청자의 동질성을 발견하게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와 같은 말들에서 청자는 고개를 떨구기도 한다. 참았던 눈물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에 루시드폴이라는 이름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온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루시드폴의 팬이 된다.

시적인 가사를 쓰는 루시드폴, 그는 평소 어떤 시를 읽어왔을까.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에 대해 숱하게 말하고 다닌 덕분이다. 그걸 보고 몇 해 전에 어느 출판사에서 두 사람을 연결해주었다.

중앙일보

루시드폴과 마종기의 편지를 담은 책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사진 문학동네]




시처럼 가사를 쓰는 뮤지션과 그 뮤지션이 동경했던 시인은 그것을 계기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주고받은 2년 치의 편지는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아주 사적인, 긴 만남(문학동네, 2014)』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두 사람의 인연이 기록되어 있다.

2002년, 루시드폴이 처음 유럽으로 갔던 때였다. (그는 스위스에서 상을 받은 공학 박사이기도 하다. 인기가수이면서 실력 있는 과학자라니, 짜증이 나려고 하지만 잠깐만 참아보자. 오늘의 진짜 주인공은 루시드폴이 아니니까) 스톡홀롬에 도착한 첫날 밤, 불현듯 적적해진 그는 가져온 책 중 한 권을 꺼내 펼쳤다. 과거 한 라이브 클럽에서 팬으로부터 선물 받았던 마종기의 시집이었다.

그는 책을 열자마자 깊은 위로를 느꼈다. 그리고 삽시간에 마종기에게 빠져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루시드폴은 마종기가 발표한 모든 시와 산문을 읽어 치우기에 이른다. 이 시기가 그의 음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 없다. 2집『오, 사랑(2005)』에 실린 곡들은 대개 마종기의 시를 읽으며 쓴 곡들이라고 한다.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마종기, 박꽃 부분





유학 첫날밤 루시드폴이 읽었다는 시집 『이슬의 눈(문학과지성사, 1997)』 수록된 시다. 툇마루에 앉아 먼 풍경을 보던 부자, 눈은 똑같이 박꽃을 보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서로 다른 감정이 일었나 보다. 아들은 태평하고 아버지는 울었다. 아버지가 왜 우셨는지 아들은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알 수 없음’이 슬프다. 핏줄이지만 결국 타인이어서, 인간이 끝끝내 혼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서, 그 아득한 타자성이 우리의 숙명 같아서, 슬프다.

중앙일보

마종기 시인. [중앙포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마종기는 동화작가 마해송과 현대 무용가 박외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의 때는 일제강점기 시절이었고, 장소는 일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글을 잘 썼고, 공부도 잘해서 연세대 의대에 진학했다.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1966년 미국으로 가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의과대 교수를 했는데, 오하이오에서는 최고 교수에게 주어지는 상도 받았다. (자, 참았던 짜증을 표출할 시간이다.)

한편 마종기의 팬임을 밝힌 사람들은 루시드폴 외에도 많다. 이병률 시인은 롤모델이 있느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마종기 시인을 꼽는다. 얼마 전 신간 산문집을 들고 돌아온 김소연 시인도 평소 틈틈이 마종기를 꺼내 읽는다고 한다.

나태주 시인은 과거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시』라는 책에서 마종기의 바람의 말을 소개한 바 있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이라는 시구로 끝나는 작품인데, 혹시 기억하시는지? 한 십오 년 전쯤 광화문 K생명 앞에 걸려 있던 시구이기도 한데.

이토록 팬이 많은 마종기이지만, 역시 그의 팬 하면 루시드폴을 꼽게 된다. 이 둘의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되는 재미까지 누릴 수 있어서다.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루시드폴 2집에 수록된 물이 되는 꿈에 영감을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마종기의 시다.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물빛1 부분

‘투잡’을 전부 잘하는 ‘엄친아’라는 사실 외에도, 마종기와 루시드폴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루시드폴은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왔다가 유럽으로 날아가 공부했다.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그는 상당한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마종기는 아예 침략국에서 태어난 데다가, 훗날 미국에서 커리어를 쌓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는 평생 모국어로 아름다운 글들을 썼고, 그 고집이 좋은 결실을 낳았다. 훗날 유럽에서 외로움과 싸우던 한 공학도가 그의 아름다운 시들을 읽고, 더 많은 사람을 위로하는 뮤지션이 되었다. 이제 마종기의 시도, 루시드폴의 노래도 감상할 수 있게 된 우리로서는, 그저 고마운 일이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중앙일보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