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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이슈 [연재] 뉴스1 '통신One'

[통신One]아름다운 풍경 속 총성없는 전쟁…WTO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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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직장 중 가장 풍광 좋은 곳에 위치

4월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서 한국 '극적 승리'

[편집자주]정통 민영 뉴스통신사 뉴스1이 세계 구석구석의 모습을 현장감 넘치게 전달하기 위해 해외통신원 코너를 새롭게 기획했습니다. [통신One]은 기존 뉴스1 국제부의 정통한 해외뉴스 분석에 더해 미국과 유럽 등 각국에 포진한 해외 통신원의 '살맛'나는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현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생생한 이야기, 현지 매체에서 다룬 좋은 기사 소개, 현지 한인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슈 등을 다양한 형식의 글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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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제네바의 WTO 본부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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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뉴스1) 김지아 통신원 =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식물원(Jardin Botanique) 방면 28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전 세계에서 가장 풍광이 좋다고 소문난 직장이 있다. 제네바 공항에서 이 버스를 타면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데 그 이유를 제네바 공항을 빠져 나와 15분쯤 지나면 금방 알게 된다. 이 버스의 노선이 세계보건기구(WHO)역을 시작으로 국제노동기구(ILO)를 거쳐 유엔(UN)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풍광 좋은 직장은 WHO도, UN도 아니다.

UN을 지나자마자 닿는 종착역인 제네바식물원역은 처음에는 그저 아늑한 동네 어귀의 풍경을 보여준다. 소풍 나온 유치원생 무리가 식물원 정문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지나간다. 하지만 이곳에도 국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업무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있다. 식물원 맞은 편에 위치한 긴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바로 세계 무역 장벽을 없애고 회원국 간 무역 분쟁을 해소할 목적으로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이 건물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관광버스가 싣고 온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있는 UN 앞 풍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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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내부 휴게 장소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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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를 둘러싼 경관은 빼어나다. 정문 앞에는 아름답게 꾸며진 넓은 식물원이 있고, 건물 뒤편으로 제네바(레만) 호수가 펼쳐져 있다. 수많은 요트가 호수에 떠다니고 사람들은 호숫가에서 여유롭게 수영과 산책, 피크닉 등을 즐긴다.

외관상으로만 보면 여느 멋진 휴양지의 특급 호텔 못지않다. 그런데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은 사실 각국의 통상 관계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격돌의 현장이다.

WTO 회원국 대표들은 일반 이사회(General Council)을 통해 주요 현안들을 논의하고 결정한다. 원칙적으로는 각료 회의(Ministerial Conference)가 최고의사결정기관이다. WTO다자무역협정 하의 모든 분야에 대한 결정권을 각료회의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료회의는 개최지를 달리하며 최고 2년에 1회 열린다. 그래서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구 역할은 제네바에서 연간 5~6회 정도 수시로 열리는 일반이사회가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이사회에서 논의되거나 결정된 내용이 구속력을 갖는 건 아니다. 하지만 164개국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인 만큼 결정 사항은 국제사회 여론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지난 7월 있었던 WTO 일반이사회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관련해 첨예한 대립을 벌였다. 한국 정부 수석 대표로 참석했던 김승호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를 '바로 옆자리에 앉은 일본 대표와 눈길도 마주치지 못하는 험악한 분위기'라 표현했으니 얼마나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지는 곳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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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에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를 제기한 한국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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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이사회보다 더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곳은 바로 WTO 분쟁해결기구(WTO Dispute Settlement)다. 회원국끼리 다툴 수 있는 국제 법정을 제공해주고 중재과정에서 내린 결정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6월에 있었던 일명 '한·중 마늘분쟁'은 국가간 무역 갈등을 풀 기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당시 한국은 중국산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취했고 중국이 이에 대응해 한국산 휴대용 무선전화기와 폴리에틸렌에 대한 보복조치를 내리면서 양국의 무역 분쟁이 시작됐다.

중국의 대응은 국제 규정에 어긋난 것이지만 당시 중국이 WTO에 가입하지 않아 우리나라는 어디에 제소하거나 중재를 요청할 데도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만약 당시 중국이 지금처럼 WTO에 가입되어 있었다면 이곳 WTO 분쟁해결기구의 제소 절차를 통해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WTO는 1995년 출범 이후 500건 넘는 전세계의 무역 분쟁을 WTO분쟁기구를 통해 해결했다. 한국은 2019년 현재까지 제소 20건, 피소 18건의 분쟁에서 직접 당사자로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직항편이 없기에 유럽 다른 도시를 경유하여 13시간 넘게 쉬지 않고 날아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 WTO지만 여기서 분쟁 판결이 나면 당장 한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국민의 일상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2004년 한국이 일본의 김 수입 할당제(쿼터제)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WTO 분쟁해결기구에 제소했던 것이 그 예다. 양자 협의를 통해 2006년 일본은 한국산 김 수입을 대폭 늘리기로 하는 대신 한국은 제소를 취하했다. 이후 한국은 전 세계 김 생산 1위, 일본은 한국 김의 최대 수입국이 됐다.

올 4월에는 더욱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다. 한국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조치에 대해 일본이 제소한 사건에서 한국이 역전승한 것이다. 과학자, 변호사, 공무원들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민관 합동 팀은 상소심을 앞두고 3주간 제네바에서 합숙했고 매일 모의재판을 했다고 한다.

영어 발음 하나라도 틀리면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 할 수 있기 때문에 억양과 발언 시간 까지 치밀하게 계산하며 준비했고, 마침내 전례를 깨고 1심 결과가 뒤집히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에서 약 9000㎞나 떨어진 WTO에서 벌어지는 승부가 한국인들의 삶과 안전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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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관리들이 WTO 일반이사회에 출석했다. ©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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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조치 패소 이후 국제기구 대응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인지 일본 외무성은 앞으로 WTO 관련 예산을 2배 늘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이어 백색국가(수출심사우대국)제외를 감행하는 등 일본이 한국만을 겨냥한 무역 보복을 남발하는 상황에서 한국정부도 WTO 제소를 준비하며 대응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WTO의 한가로운 풍경과는 달리 이처럼 막후에서 벌어지는 ‘총성 없는 전쟁’이 바로 WTO의 진면모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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