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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항일은 그분들의 숙명…우리는 기억으로 갚아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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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매일경제는 국내외에 거주하는 국가유공자 후손들을 만나 독립투사들에 대한 추억을 들어봤다. 왼쪽부터 오성묵 릴리야 씨, 그레이스 송 윤 씨, 박문성 씨. 박씨는 본인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처리했다. [이승환 기자 / 사진 제공 = 한국해비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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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 누구도 독립운동가들에게 '왜 독립운동을 하느냐'고 묻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에게 나라를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겁니다. 그런 선친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로 74번째를 맞은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선친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선친들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광복절의 뜻을 이어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만난 오성묵 릴리야 씨(82)는 구겨진 흑백 사진을 꺼내 들었다. 그의 주름진 손가락은 러시아어로 '오셴묵'이라 적힌 청년의 얼굴을 짚었다. 선한 눈매 속에도 감출 수 없는 강인함을 가진 사진 속 인물은 일제시대 러시아 극동시베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던 독립유공자 오성묵 선생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릴리야 씨는 오 선생의 막내딸이다. 국가보훈처의 초청을 받아 지난 12일부터 한국에 머물고 있는 릴리야 씨는 오 선생을 뿌리로 하는 가족 관계도를 직접 준비해왔다. 관계도에는 러시아, 카자흐스탄에 흩어져 사는 오 선생의 자녀, 손자녀 등 90여 명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어림잡아 120㎝는 돼 보이는 관계도 속에는 오 선생의 뜻을 이어온 가족들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오 선생은 1911년 북간도에서 청년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펼쳤고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에 참가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행정기관인 연통제(聯通制) 함경도 독판(督辦·현재의 도지사)에 임명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과 활동했다. 오 선생은 평생을 가족 주변을 맴도는 일본 순사를 피해다녔다. 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탓에 생전 고국 땅은 밟지도 못했고 딸이 한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런 아버지를 릴리야 씨는 단 한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에 맹렬히 저항했고 그게 나라 잃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릴리야 씨는 "독립을 위해 평생을 타지에서 싸운 아버지와 무수한 용사를 잊지 않고 찾아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부부 윤응호·김도연 선생의 며느리 그레이스 송 윤 씨(87)도 이날 윤 선생 부부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회상했다. 그레이스 씨는 "독립운동은 그들의 인생이었다"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없는 살림에 돈을 보내고, 일본에 대항할 비행사를 키워냈다"고 했다. 1881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윤 선생은 1900년대 초반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의 미국 캘리포니아주 한인비행사양성소의 간사로 활동하며 공군 양성에 노력했다. 간사 활동으론 생계를 꾸리기 부족해 농장, 시장 등에서 막노동에 가까운 일을 했다. 자식 5명을 키우면서도 부부는 1913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수입의 20%가량을 독립자금으로 후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레이스씨는 "해방된 고국 땅을 밟는 것이 시부모님의 소원이었는데 내가 직접 찾아오니 그분들 생각이 많이 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국내에서 나고 자란 독립유공자 후손인 박문성 씨(가명·79)에게도 '광복'은 선친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박씨는 1919년 4월 울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최현표 선생의 외손자다.

최 선생은 서울에서 3·1운동이 전개됐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청년들과 뜻을 모아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결국 일본 경찰에 붙잡힌 최 선생은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씨는 "나의 말과 행동이 선조에게 누가 돼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며 "훌륭하신 분들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언행에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박씨가 독립유공자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것은 그의 집 대문에 걸린 '독립유공자의집'이라는 명패뿐이다. 홀로 지내면서 집 곳곳에는 곰팡이가 슬었다. 한겨울에도 연탄으로 방에 온기를 더해야 했다. 비영리공익법인 한국해비타트는 시민들로부터 기부금을 모금해 오는 10월께 박씨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데 지원할 예정이다.

[문광민 기자 / 신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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