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사랑했던 애국지사, 병마 끝에 74주년 광복절 앞두고 별세
며느리 "현재 한일관계 알았다면 참기 어려운 하루하루 보냈을 것"
김병길 애국지사 모습 |
(부산=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평소 과묵하셨던 저희 아버님도 일본 경제보복을 상당히 안타까워하셨을 겁니다."
제74주년 광복절을 일주일 앞두고 향년 96세 일기로 별세한 부산 유일 생존 애국지사 김병길 선생.
김 선생을 15년 가까이 모신 며느리 윤혜정(50) 씨는 고인이 자신이 애국지사였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회고했다.
윤 씨는 "아버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시게 된 이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셨다"면서도 "그동안 살아오신 날을 비춰 현재 한일 관계를 마주하셨다면 안타까움과 속상함으로 참기 어려운 하루하루를 보내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1남 5녀를 둔 고인은 이달 7일 오후 8시 45분 뇌졸중으로 치료받던 부산보훈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6세다.
그는 지난해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1년간 부산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광복회 행사 등에 왕성하게 참석하며 활동했다.
그러나 지난해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한 달 만에 뇌졸중이 찾아와 급격히 기력이 약해졌다.
그동안 부산광복회 유일한 애국지사로 고인을 제외하고는 애국지사 유족들만 남은 상태였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19세 때 일본군 제51 해군 항공창에 근무하게 됐다.
그는 당시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심하고 박준기, 김차형 등 동지 11명과 함께 항일결사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했다.
일심회는 연합군이 진해에 상륙할 때 무장봉기해 항공창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준비 활동을 진행했다.
이들은 항공창 항공기와 변전소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던 중 일제에 조직이 노출돼 1년 만에 붙잡혔다.
고인은 4개월에 걸친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1944년 7월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찾아오기 전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김병길 애국지사(왼쪽 첫 번째) |
정부는 1990년 그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윤 씨는 "아버님은 일제강점기 활동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광복회 행사에 참석하거나 은행 등에 가면 "애국지사 김병길입니다"라는 말을 먼저 했다고 한다.
고인의 태극기 사랑은 남달랐다.
행사에 가서 받은 작은 태극기라도 장롱 등에 고이 보관했고, 국기 게양이 필요한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아파트 외벽에 게양하고 해가 져야 내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유족들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놓을 비석에 고인이 평소에 메모로 남겨둔 한마디를 세길 계획이다.
그 구절은 '님께서 사랑하신 조국은 님의 뜻대로 늘 푸르르리'다.
윤씨는 "평생을 당신이 애국지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뿌듯해하신 아버님이 편히 잠드셨으면 좋겠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pitbul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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