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391호 부산진순절도. 1592년 4월 13일과 14일 이틀간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760년(영조 36) 화가 변박이 그렸다. /사진=육군박물관 소장.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국보의 자취-6] 1592년 4월 12일(음력) 부산 앞바다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왜선은 삽시간에 바다를 꽉 매웠다. 다음 날인 13일 전열을 정비한 왜군들은 맹렬한 기세로 상륙을 감행했다. 조선 조정은 왜군의 침략 조짐을 미리 감지하고 사전에 명장들을 일본과의 최전선에 집중 배치했다. 여수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비롯해 울산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 부산 수영의 경상좌수사 박홍, 거제의 경상우수사 원균이 그들이다. 부산에 왜군이 처음 나타나자 순찰사 김수, 밀양부사 박진, 김해부사 서예원도 급파됐다.
그런데 이각, 박홍, 박진, 서예원, 김수는 싸우기는커녕 적을 보고 겁먹고 도망치기 바빴다. 원균 역시 몰려드는 왜선을 멀리서 바라만 볼 뿐 싸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원균은 그러다가 적군이 처음 육지에 오르자 전선 100여 척과 화포, 병기를 모조리 바다에 침몰시킨 뒤 도주해 버렸다. 다만 부산포 첨사 정발이 절영도(영도)에서 사냥 도중 급히 성으로 복귀해 적을 맞다가 죽었다. 다대포 첨사였던 윤흥신은 노비 출신이었으나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평생 글만 읽던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루에서 반나절 동안 고군분투하다가 왜적의 칼에 찔려 장렬하게 숨졌다.
국보 제132호 징비록. 임진왜란 전후 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소장.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은 이처럼 기가 막힌 사실을 고발한다. 징비록은 저자가 정무와 군무 최고기관인 비변사 수장으로서 피비린내 나는 전란을 겪고 난 뒤 모진 환란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에서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백서이다. 징비는 시경의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전쟁 후 벼슬에서 물러나 썼고 간행은 1647년(인조 25) 이뤄졌다. 임진왜란 전 국내외 정세부터 전쟁의 실상, 전후 상황까지 가장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기술해 국보 제132호로 지정됐다. 책은 저자 자신을 포함한 조정 신료들과 임금, 사대부, 군지도부 등 지도층의 잘잘못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밝힌다.
개전 초기 무수한 골든타임이 있었지만 군지도부는 하나같이 이를 무시했다. 경상순변사 이일은 상주에서, 총사령관 신립은 충주에서 적군이 근접했다고 보고하는 군관들을 "망령된 보고로 동요시킨다"며 목을 베어 죽였다. 이미 적들은 턱밑에까지 와 있었고 적의 급습에 우왕좌왕하다가 몰살당했다. 천혜의 문경새재를 활용하지 못한 일은 후일 명나라 군대에 조롱거리가 됐다.
선조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신립이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전갈을 받자 4월 30일 나라와 백성을 뒤로한 채 한밤중에 서둘러 도성을 빠져 나갔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온 왜군은 여주에서 한강을 건넜다. 강을 지키는 군사는 없었다. 강을 건너다 물살에 휩쓸려 많은 왜적이 수장됐다. 왜군은 여러 날에 걸쳐 천천히 다 건너왔다. 또다시 손쉽게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버렸던 것이다.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한 지 불과 19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해버렸다.
평양에서도 강물이 왜군의 발목을 잡았다. 강을 건너오는 적에게 화살을 쏘는 전략이 먹혔다. 하지만 날이 가물어 수위가 나날이 낮아졌다. 단군사당, 기자사당, 동명왕 사당에 보내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적군은 수심이 얕은 왕성탄 쪽으로 도강했다. 평양성은 이미 임금과 병사, 백성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성이었다. 성안에는 식량난을 대비해 세금으로 거둔 곡식 10만석이 옮겨져 있었다. 식량은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는 다급해졌다. 중국만 바라봤다. 중국에 사신을 연이어 파견해 사태의 위급성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했다. 급기야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마당에 중국에 나라를 바치자는 주장이 비등했다.
이순신을 몰아내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은 이순신이 전략을 논의하던 운주당 건물에 첩을 데려와 거주했다. 장수들과 접촉이 없었으며 술을 좋아해 술주정이 다반사였다. 그때 적이 쳐들어왔다. 권율의 질책으로 출전했지만 허둥대다가 수많은 배와 군사를 잃었다. 남은 조선군은 거제 칠전도에 주둔하다가 다시 적의 기습을 받아 완전히 궤멸됐다. 원균은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지만 몸이 비대해 소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류성룡은 원균이 혼자 있다가 왜군에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칠전도에서 승리한 왜는 남원을 거쳐 충청과 전라를 유린했다.
첩보전에서도 조선은 한참 하수였다. 왜는 조선인을 포섭해 간첩으로 활용했다. 간첩에는 조선 군인들도 여럿 포함돼 있었다. 사로잡힌 첩자 김순량은 "간첩이 없는 곳은 없다. 일이 일어나는 대로 보고한다"고 자백했다.
7년간의 전쟁 동안 왜군 30만명(임진왜란 16만명, 정유재란 14만명)은 한반도를 철저히 유린했다. 거의 모든 고을은 쑥대밭이 됐고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사전에 무수한 침략 징조가 있었지만 조선이 이를 무시해버려 비극을 자초한 것으로 우리는 이해한다. 정작 '징비록'은 다른 얘기를 한다. 조선 조정은 조선반도를 침략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성일과 황윤길이 상반된 보고를 했지만 대비할 필요성을 정확히 인식했다. 남부지방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삼도의 방어를 맡겨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했다. 경상도에는 많은 성을 쌓고 영천, 청도, 합천,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지에도 병영을 신축하거나 고치도록 했다. 그런데 모두가 너무 오랜 평화에 길들여져 있었다.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태평 시대에 당치 않게 성을 쌓느냐는 상소가 빗발쳤고 홍문관도 공사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병법의 활용, 장수 선발, 군사 훈련 방법 등의 정비는 논의조차 못했다. 류성룡은 유사시 각 향촌에서 군사를 군사 거점에 집결시켜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도록 하는 '제승방략법'의 폐단도 지적했다. 군사들이 모여 있더라도 지휘관이 내려오기 전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지리멸렬하게 될 것으로 예측하고 각 지역 수령에게 군사통제권을 부여해 적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래전부터 시행해 오던 체제를 바꾸기는 힘들다"는 반론에 부딪혀 그 제안은 폐기됐다.
명나라가 참전해 평양성에서 승리하면서 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은 1년여 뒤인 1593년 4월 20일 수복했다. 서울의 백성은 10분의 1만 남아 있었다. 성안은 시체 썩는 냄새로 진동했다. 종묘와 세 대궐, 종루, 각사, 관학 등 대로 북쪽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은 남김 없이 재로 변해 있었다. 적들은 추격을 받지 않고 느긋하게 후퇴했다. 그들의 길목에 머물던 우리 군사들은 적이 나타나도 이리저리 피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서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전염병이 창궐해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고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 일본 오사카시 호코쿠 신사 소재.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징비록'의 가치는 일본에서 높게 인정받았다. 임진왜란 후 비공식 경로로 일본에 유입돼 1695년에는 국책사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1719년(숙종 45년)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일본 오사카를 방문한 신유한(1681~1752)은 그곳에서 국가기밀에 속하는 '징비록'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적을 정탐하여 적에게 일러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며 조선의 기강이 엄하지 못함을 탄식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왜란이 끝나고 38년 만에 조선은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한다. 그러고도 외부를 향해 물꼬를 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졌던 조선은 결국 일본에 멸망했다.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된 다음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임진왜란과 놀랍게도 닮았다. 온 국토가 외세의 힘이 부딪치는 전쟁터가 되면서 무수한 국민이 죽어 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지도자란 자들은 한결같이 저 살기에만 급급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얼마나 바뀌었는가.
[배한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